항목 ID | GC05201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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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爾松 |
이칭/별칭 | 수옹(壽翁),개곡(開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수옹(壽翁), 호는 개곡(開谷). 증조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 參議) 이희성(李希聖), 할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이득춘(李得春), 아버지는 봉열대부(奉列大夫)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을 지낸 이의준(李義遵), 어머니는 산음 현감(山陰 縣監) 김대현(金大賢)의 딸 풍산 김씨(豊山 金氏), 부인은 절충(折衝) 박경길(朴敬吉)의 딸 밀양 박씨(密陽 朴氏), 후처는 권양득(權養得)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활동 사항]
이이송(李爾松)[1598~1665]은 1598년(선조 31) 경상도 의성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장해서는 김영조(金榮祖)[1577~1648], 김응조(金應祖)[1587~1667]에게 수학하였다. 1632년(인조 10) 천거로 창릉 참봉(昌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635년 문과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제수되었으며, 1636년 공조 좌랑(工曹 佐郞)이 되었다.
1638년 좌막(佐幕)으로 충청도를 다녀온 후에는 예조 좌랑(禮曹 佐郞)이 되었다가 곧바로 병조(兵曹)로 옮겼다. 1639년 다시 예조 좌랑이 되었고,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예조 정랑(禮曹 正郞)에 제수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장차 이이송을 양사(兩司)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강력히 반대하는 이가 있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40년 호남 막영(湖南幕營) 좌막이 되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하게 되었다.
1643년 예조 정랑으로 있을 때, 내원(內苑)에 별전(別殿)을 짓는 공사가 있었는데, 인조는 백성을 동원함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오직 내노(內奴)에게 명령하여 공사를 시켰다. 이때 이이송은 “내노도 역시 백성이므로 편벽되게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인조는 상소에 가납(加納)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해 함평 현감(咸平 縣監)으로 나갔으며, 1647년 다시 낭관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풍기 군수(豊基 郡守)로 부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많은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1652년(효종 3)에 다시 예조 정랑으로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를 마친 후 관로에 나갈 뜻이 없어 청성산(靑城山) 상류에 집을 짓고 편액을 낙고 초당(洛皐 草堂)[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이라 하였다. 1656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성균관 전적과 통례원 상례(通禮院 相禮)에 올랐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다 1665년(현종 6) 예빈시 정(禮賓寺 正)에 제수되어 숙사(肅謝) 하러 한양에 갔다가, 9월 7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5권 2책의 『개곡집(開谷集)』이 전해지는데, 1811년(순조 11) 후손에 의해 간행되었다.
[묘소]
묘소는 처음에 의성현 북장동(北長洞)이라는 곳에 묘소를 마련했다가, 안동부 일직현(一直縣) 국곡(菊谷)[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국곡리]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에 위치했던 용암사(龍巖祠)에 이봉춘(李逢春)[1542~1625]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