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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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瑗 |
이칭/별칭 | 백옥(白玉),남애(南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김상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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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김상원 이시 문하에서 수학 |
몰년 시기/일시 | 1687년 - 김상원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 『남애집』 간행 |
출생지 | 의성 만취당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7 |
거주|이주지 | 의성 만취당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7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사재곡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상락(上洛) |
대표 관직|경력 | 숭정처사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상락(上洛)]. 자는 백옥(白玉), 호는 남애(南厓). 할아버지 김사원(金士元)이고, 아버지는 예빈시 직장(直長) 김준(金濬)이고, 어머니는 부장(部將) 권돈(權暾)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부인은 진사 이형남(李亨男)의 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고, 후처는 첨지중추부사 안벌(安橃)의 딸 죽산 안씨(竹山 安氏)이고, 슬하에 아들 김성좌(金成佐)와 세 명의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상원[1598~1687]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역질에 걸려 매우 위중할 때 변(便)을 맛보며 차도를 진단하고, 손가락을 끊어 피로써 간병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여러 동생들과 함께 여막을 지어 상주의 예를 다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이시(李蒔)를 찾아 유학(留學)하고, 자라서는 수암(修巖) 유진(柳袗),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후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역락재(亦樂齋) 김치관(金致寬)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교의(交誼)가 두터웠다.
향시에는 연거푸 네 번이나 합격하였지만 과거에는 수차례 실패하였으며, 1636년(인조 14)에도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병자호란으로 예시(禮試)에 나가지 못하였다. 이후 과거 시험에 대한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대명숭정(大明崇禎)’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충신열사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임금의 기일을 잊지 않고 소식(素食)하며, 군신의 의를 지키니 세인들이 ‘숭정 처사(崇禎 處士)’라고 불렀다.
동생 김상기(金尙琦)와 함께 안동 권씨, 영양 남씨 등 지역의 여러 성씨들과 더불어 할아버지 김사원 당시에 만든 동규(洞規)를 다듬은 「사촌리 약중수(沙村里 約重修)」를 만들어 시행함으로써 향풍을 선도하였고, 후진 양성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김상원은 90세까지 생존하였는데,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이어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이 내려졌다.
[학문과 저술]
김상원은 15세인 1613년(광해군 5)에 이시를 찾아 유학하였고, 자라서는 유진에게 경전(經傳)을 배운 후 사문(斯文)의 종사로 있던 정구, 장현광 등의 문하에서 반년씩 유학하여 학문을 익혔다. 김응조, 이유장, 김치관 등을 학문의 벗으로 사귀고, 특히 이웃 마을의 선배 학자인 김치관과는 상수(象數)를 토론하여 스승인 장현광의 칭찬을 받았다. 유고(遺稿)가 있었으나 병란에 소실되고, 남은 유고를 모아 후손 김억(金檍)이 보존해 오다가 2006년에 후손들이 국역판 『남애집(南厓集)』을 간행하였다. 『송은 선생 문집(松隱 先生 文集)』에 「만년 송정운 차운(萬年 松亭韻 次韻)」 시가 전해온다.
[묘소]
묘는 만취당 김사원의 묘역이 있는 의성군 단촌면 목촌동(木村洞)[단촌면 관덕 1리] 사재동(思齋洞)[사재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88세인 1685년(숙종 11)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이어서 용양위 부호군이 내려졌다. 가장(家狀)은 조카 김성좌(金聖佐)가 짓고, 묘갈명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