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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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時調詩人李鎬雨-李永道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병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2년 - 이호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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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 이호우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6년 - 이영도 츨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이영도 사망 |
이호우·이영도 생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24 |
[개설]
시조는 유장한 우리 민족시의 본류요 정수이다. 경상북도 청도의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호우(李鎬雨)[1912∼1970], 이영도(李永道)[1916∼1976] 오누이 시인이 시조 문학의 현대화에 끼친 영향은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오누이 시인의 시정신과 시적 배경, 사상과 철학이 갖는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 문학의 토양으로 삼는 일은 문화 민족의 올바른 자세라 하겠다.
[시대의 저항 정신을 시조로 풀어내다]
이호우는 호도 이호우(爾豪愚)[너 호방하고도 어리석어라]로,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번지에서 아버지 우강(又岡) 이종수(李鍾洙)와 어머니 구봉래(具鳳來)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의명 학당(義明學堂)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운 할아버지 혜강(兮岡) 이규현(李圭現)은 고명한 한학자이자 선비였고, 여러 고을의 군수를 지낸 아버지 또한 서화에 능하여 이호우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가풍과 예술적 전통이 조화롭게 구비된 환경에서 자라났다.
1923년 월반(越班)으로 밀양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되던 때 맏형 이석우(錫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끝내는 신경쇠약으로 학업을 포기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요양하다가 다음해 일본 동경 예술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여기서도 신경쇠약 증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위장병까지 얻게 되자 다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이호우는 건강을 회복하는 일 외에 전통적 서정을 익히며 문학과 예술 지향의 젊은 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비판 정신으로 거듭나게 한 시간들이 되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직접적인 단초는 아버지와의 마찰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이호우의 증조할아버지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승복으로 갈아입고 뒷산에 대운암(大蕓庵)이라는 암자를 지어 속세를 등졌고, 할아버지 또한 일제 치하에서 벼슬을 마다하고 농사일로 생계를 꾸리는 한편 사립학교를 지어 농촌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반일(反日) 집안이었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조상의 뜻을 저버리고 창피스럽게도 일제 때 관직을 맡아 골을 옮기며, 소실을 거느리고 타향을 돌았기 때문에 삼남매는 아버지 여윈 시절을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비롯된 이호우의 시대와 불의를 향한 저항 정신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체질화되었다고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호우는 1934년 경상북도 칠곡에 살고 있던 김진희(金晋熙)의 딸 김순남(金順南)과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이상붕(李相鵬)을 낳았으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시조 공부가 시작되었다. 1936년에는 작품 「영춘송(迎春頌)」으로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에 입선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동아 일보』 독자 투고란에 「낙엽(落葉)」·「진달래」·「새벽」 등을 투고하였다. 이때 심사를 맡았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가 엽서를 보내 『문장(文章)』지 추천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0년 『문장』 6, 7월호에 「달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또한 1937년 차남 이상인(李相麟)에 이어 1941년 3남 이상국(李相國)이 출생하면서 1945년까지 밀양과 유천 등에서 정미소, 만물상, 제재소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광복 이후 이호우는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대구시 대봉동으로 이사하였는데, 여기서 문예지 『죽순(竹筍)』과의 만남은 이호우를 본격적인 문학인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질타하던 예리한 필봉 이호우]
대구 고등 법원 재무과장을 시작으로 문화 극장 사무과장, 『대구 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서울 주재 특파원, 『대구 매일 신문』 편집국장으로 이어진 이호우의 직업은 대부분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가열시키기에 알맞은 역할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과격한 논조로 비리와 불의를 고발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모함과 필화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 첫 번째 불행은,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남로당 도 간부라는 모략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이듬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시인 김광섭의 진언으로 가까스로 풀려난 사건이었다.
또 한 가지는 1954년 「바람벌」이라는 작품을 『현대 문학』 3월호와 대구 대학보에 발표했다가 반공법에 저촉된다 하여 기소되는 필화(筆禍)를 겪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질타하던 예리한 필봉의 저널리스트 이호우의 필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8년 당시 『매일 신문』 편집국장이던 시절 KNA기 납북 사건 때도 그의 사설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이유로 또다시 필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시조라는 민족 문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해서 1954년 윤계현(尹啓鉉)과 함께 『고금 명시조 정해(古今名時調精解)』[문성당, 1954]를 펴냈으며, 1955년에는 첫 시집인 『이호우 시조집』을 출판하여 제1회 경상북도 문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 시련과 고초를 겪기는 하였지만 이호우에게는 이 무렵이 생애 가장 치열한 삶을 경험한 소중한 시기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잠시 경북 반민주 행위자 조사 위원으로 참여한 것 외에는 일체의 공직에 나가지 않고 대구시 대명동 1805번지 청구 주택 60호로 이사해서 문학 활동에만 전념하며 주로 『죽순』과 『현대 문학』지를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5년 ‘경북 시조 동우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67년 ‘영남 시조 문학회’로 개칭하면서 초대 회장을 맡아 후진 양성과 시조 문학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여기서 발간한 사화집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낙강(洛江)』인데, 이호우가 쓴 서문을 보면 시조에 대한 철학과 자세가 어떤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턱대고 내 것만 앞세우는 과잉 자취의 사고도 마땅치 않지만 외래 사조에 맹목한 사대적 자비 사상은 더욱 배제되어야 할 줄 안다. 남의 가락에 덩달아 난무하기에 앞서 보다 먼저 나의 목소리와 핏빛과 몸짓과 식성 또는 체온을 찾고 배우고 생각해 보는 마음들이 모여 동인 작품집 『낙강』 제1집을 간행한다.”
1968년 이호우는 한국 최고의 여류 시조 시인인 누이 이영도와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중앙 출판 공사] 속에 『휴화산』[이호우 분], 『석류』[이영도 분]를 함께 간행하게 되는데, 『휴화산』은 이미 1955년에 간행한 『이호우 시조집』의 작품들을 전제함으로써 선집(選集)이 되었다.
[고독의 길 끝에서 이호우 다시 조명되다]
이호우의 생애는 공교롭게도 근대화 과정에서 조국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역사와 겹쳐져 있다. 일제의 주권 침탈과 동족 간에 겪어야 했던 이데올로기 투쟁, 그리고 독재와 민중의 자각 등 어느 하나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들과의 갈등에 휩싸이는 나날들이었다. 183㎝의 훤칠한 키에 체중 55㎏의 바싹 마른 체구의 이호우로서는 어느 한 가지도 감내하기가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만년에는 이 모든 좌절과 절망을 오로지 시조를 통해서만 풀며 선비다운 자기 영토를 넓혀 나갔으나, 1970년 1월 6일 대구 시내 동문 다방을 나와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장례는 1월 10일 협성 상고 교정에서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러진 뒤 유해는 고향집 건너편인 밀양시 상동면 어목산(漁目山) 중턱의 선영에 잠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고독의 길을 선택했던 생전의 모습과는 달리 사후(死後)에 그는 오히려 관심과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1972년 1월 6일 후배 문인들에 의해 대구 앞산 공원에 ‘이호우 시비’가 제막되었고, 1992년 12월 15일 고향의 주민들에 의해 남성현 고개에 「살구꽃 핀 마을」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2003년 11월 29일에는 청도군이 나서서 고향 마을 앞에 또 하나의 시비를 세웠다.
1991년에는 ‘이호우 시조 문학상 운영 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이듬해 제1회 이호우 시조 문학상이 시상되었다. 제11회 때부터는 출신지인 청도군에서 주관하여 지금까지 21명의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이러한 관심과 애정은 출판으로도 이어져 1992년에는 이호우 시조 전집 『차라리 절망을 배워』[문무학·민병도 편저, 그루]가 간행되었고, 2000년에는 우리 시대 현대 시조 100인선에 선집으로 『개화』[태학사]가 발간되었다. 2012년에는 이호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호우 시조 전집 『삼불야』가 간행되고 추모 시화전, 특집, 초청 특강이 여러 기관에서 펼쳐져 민족 문학의 종가인 시조의 새로운 위상 제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012년에는 대산 문화 재단에서 선정한 ‘탄생 100주년의 문학인’으로 선정되어 세미나를 비롯한 각종 추모 사업이 전개되었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질서 속에 민족 문학의 독자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지는 상황에서 이호우의 시정신과 그가 남긴 작품의 성과는 민족 문학, 특히 시조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수십 번의 퇴고와 개작, 그리고 투철한 시정신]
이호우 시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차별성은 투철한 시정신일 것이다. 이호우는 작품 한 편을 두고 수십 년 동안 퇴고(推敲)와 개작을 거듭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이호우의 작품은 모두 185편이다. 그 가운데 첫 발표 이후 개작을 하지 않은 작품은 「달밤」, 「바람벌」, 「정좌」, 등 33편에 불과하다. 그 외에 「공일」→「휴일」, 「바위 앞에서」→「금」 등 제목을 바꾼 작품이 33편, 아예 개인 작품집에서는 버린 작품이 28편이나 된다. 그 나머지는 최소 한 번에서 「벚꽃」과 같이 16번이나 고친 작품 등 퇴고와 개작을 거듭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호우 자신이 “이번에 권하는 이 있어 시조 선집을 낸다.”라고 『휴화산』 후기에서 밝혔듯이 평생의 작업이 『이호우 시조집』이라는 시조집 한 권과 시조 선집 『휴화산』이 전부인 셈이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민족 문학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거듭거듭 자신을 옥죄었던 이호우는 『휴화산』 발간에 즈음해서는 거의 단형 시조로 제한하였고, 배행에 있어서도 3장[연] 6구[행]를 고수하여 소위 이호우 식의 시조형식을 남겼다.
그러나 이호우의 변혁 의지는 형식적인 면 못지않게 내용의 면에서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현대시의 이미지와 상징 수법을 시조 속에 차용하고 있는 점과, 분단과 민중의 현실 등 비시조적 소재를 끌어들이려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단층에서」, 「춘한 2」, 「추석」과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려 한 노력은 시조에 대한 일반의 고정관념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시조의 미래를 향한 방향성 제시이기도 하였다.
한국 시조가 일찍이 도달해 보지 못한 정신의 가열성을 획득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기(旗)빨」에 대해 김창완은 “시조 혹은 시를 버리면서까지 밀고 가는 이호우의 시정신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역사를 아파하고 역사를 앞장서 이끌어 가려고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조 문단에 남아 있는 이호우의 가장 큰 목소리는 소위 ‘잡초론’의 제기일 것이다. 일부 상업 잡지 종사자들이 잡지의 유지와 보급에 급급한 나머지 시정신이 없는 잡초 같은 신인들을 양산하여 시조 문단을 망치고 있다는 질타였다. 물론 이 같은 경고나 시정신이 그 자체만으로 문학적 성과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칫 자기 보신주의에 길들여지기 쉬운 문학이라는 정신 활동 안에서 이호우의 끈질기고 깊은 시조 사랑이 남긴 유산은 이미 계측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 하겠다.
[타고난 문장력과 뛰어난 총명, 곧은 성격의 이영도]
이영도는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에서 이호우의 누이로 출생하였다.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이영도는 초기엔 아호를 정향(丁香)으로 쓰다가 후에 정운(丁芸)으로 고쳤다.
아버지가 지방 군수로 집을 자주 비웠지만, 할아버지 이규현은 한학과 서화에 능하여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는 한편 타고난 문재(文才)를 키웠다. 1924년 밀양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기차로 통학하는 한편, 조부가 운영하는 의명 학당에서의 공부도 계속하였다. 이영도의 여러 수필에 의하면, 지나친 총명과 곧은 성격이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객지로 나가 공부하는 대신 학당의 현창식에게 사숙하게 되었다.
이호우와 마찬가지로 이영도의 유년기 역시 급변하는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승복으로 갈아입고 속세를 등진 증조할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 또한 농촌에 신학문을 보급하기 위하여 의명 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서 후진들을 가르쳤는데, 이영도의 아버지를 의명 학당 1회 졸업생으로 키웠으나 결국은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일제의 협력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는 그의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원망으로 점철되었다. 상대적으로 조부모가 숭상한 불교와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워준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어린 시절 이영도의 정신을 키운 자양분은 조부모였고 몸을 키운 요소는 어머니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두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판단력을 저울질하였으니 운명치고는 유별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경성 고등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워 온 이호우 시인이 오빠라는 점도 그를 보다 빨리 정신적으로 올곧게 성숙시킨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시조 공부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 대학에 유학하고자 한 꿈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날로 어수선해지자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이영도는 20세에 대구의 부호인 박기주(朴基澍)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신혼의 꿈도 잠시, 1936년 10월에 딸 박동지[후일 박진아로 개명]를 얻었으나 1945년 8월 원래 병약했던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그나마 해방이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라는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
이영도는 결혼 전에 쓰다가 덮어 두었던 시조 노트를 꺼내 들었고, 통영 여자 중학교[1945년 10월∼1953년 5월]를 시작으로 부산 남성 여자 고등학교[1953년 5월∼1954년 10월], 마산 성지 여자 고등학교[1954년 10월∼1956년 9월]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이영도는 딸아이의 양육을 언니 이남도에게 맡겼다.
이영도는 통영 여자 중학교 수예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바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시인과의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화가 전혁림(全爀林), 시인 김춘수(金春洙), 초정(草汀) 김상옥(金相沃)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치환과의 인연은 장차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유치환의 일방적 애정 표현으로 시작된 사랑은 많은 안타까움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1967년 유치환이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간 변함없이 지속되어 서로의 문학 세계 속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가 5,000통에 이르렀고, 유치환이 죽은 뒤 그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여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통영 여자 중학교에서의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이영도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하여 1946년 5월 『죽순』 창간호에 「제야」를, 같은 해 8월 제2집에 「낙화」와 「춘소」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천성이 부지런하였던 터라 시조 쓰는 일에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 기숙사 일마저도 나서서 열정을 쏟다 보니 자신을 추스르는 데 게을리 하여 이영도는 폐침윤 발병으로 1949년 5월 마산 결핵 요양원에서 1년간 요양을 하게 되었다. 이즈음 이영도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고, 1954년에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변화를 꾀하던 중 당시 국어 교사였던 김상옥의 추천으로 부산 남성 여자 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리고 당호를 ‘수연정’이라 짓고 그곳에서 첫 시조집인 『청저집』을 준비하고 출간하여 시조 문단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영도의 삶은 언제나 굴곡이 많았다. 1955년에는 폐침윤이 재발하여 요양을 겸하기 위해 다시 마산 성지 여자 고등학교로 임지를 옮겼고, 이번엔 당호를 닭이 운다는 의미의 ‘계명암(鷄鳴庵)’이라 지어 불렀다. 2년 여의 요양 끝에 건강 상태가 좋아지자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겨 부산 여자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부산 일보』에도 고정적으로 집필을 하였다. 이 무렵 동래 온천장 부근에 주택을 마련하고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으며, 본격적인 ‘애일당(愛日堂) 시대’를 열어 나갔다. 여기서 첫 수필집 『춘근집(春芹集)』을 발간하여 수필가로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64년에는 부산 어린이 회관[애성 회관] 관장에 취임하였으며 여성 교양 문화 모임인 ‘달무리회’를 창설하여 범부산 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사회 전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에는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한다는 취지의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같은 해에 두 번째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을 발간하는 등 절정의 문학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영도에게 이처럼 뜨거운 열정의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1967년 2월 13일 밤, 부산시 좌천동 685번지 앞길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치환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이영도의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남긴 글을 통해서 유추가 가능하다. 이영도는 수필 「유성」에서 “일찌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물론 이영도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죽음은 유치환 외에도 사별한 남편이 있지만, 유치환이 1959년 이영도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우리’란 분명 이들 두 사람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 떠납시다. 이것만은, 이 한만은 서로 풀도록 기약합시다. 그렇지도 못한다면 영혼도 눈감을 수 없는 애달픔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치환이 남긴 편지들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이영도는 유치환이 떠난 부산에 남아 있기가 힘들었음인지 그해 9월 서울시 마포구 하수동 95번지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1968년에는 오빠 이호우와 함께 공동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발간하였고, 1969년에는 유치환 서간집의 인세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 문학상(丁芸文學賞)을 제정하여 시상하였다. 같은 해 딸 박진아가 철학자 김이준과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1970년에는 이영도 시조의 또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었던 오빠 이호우가 갑작스레 죽어 크게 상심하였고, 1971년에는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을 간행하였다. 1975년에는 수필 선집 『애정은 기도처럼』을 간행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중앙 대학교 예술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재능 있는 시조 시인들을 지도하여 문단에 등단시킨 일일 것이다.
이영도는 평생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다. 일찍이 고생한 폐침윤이 아니더라도 고혈압에 시달려야 했고, 두 번씩이나 유서를 써둔 채 조마조마하게 살아왔으나 끝내 1976년 3월 6일 12시 5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3월 8일 이은상 시인을 장례 위원장으로 문인장을 치른 뒤 화장을 했고, 3월 9일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산 314번지의 친정 선영에 묻혔다.
[이영도 시에 흐르는 ‘그리움과 고독’]
시인은 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이영도의 경우 시조 외적인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시조에서 거둔 성과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고시조는 논외로 하더라도 시조가 본격 문학의 영역으로 재편된 이후로도 몇몇 여성 시조 시인의 주목할 만한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조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담금질하고 시대의 민족의 미래를 진단하며, 시조의 형식 실험에 그토록 치열했던 사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시조라는 형식 질서 안에서 전통의 정서를 수용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가장 한국적인 정신과 민족시의 외형을 일체화시키고자한 이영도의 필생의 노력이 문학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것은 지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다.
이영도 시의 미학은 삶 속에서 조우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내면에 깔린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정서이다. 누구라도 이 그리움을 독점할 수 없고, 누구라도 이 테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지녔으되 선택과 의미 부여에 따라서 상승 작용과 하강 작용을 부추기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이영도에게 그리움은 대체적으로 한(恨)으로 인도되고 다시 그 한을 극복하는 수단으로도 원용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상승적인 측면이 크다. 그리움을 통하여 자기중심의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끊임없이 바깥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기 재생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인성을 형성시켜 준 유년시절에 겪어야 했던 보편적이지 못한 가족사의 아픔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이영도를 감싸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유복하지 못한 결혼생활 및 유치환 시인과의 만남이 가져다 준 숙명적 그리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영도의 모든 시가 이들과의 만남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영도의 정신을 가로지르는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영도 시의 첫 작품은 1945년 12월에 쓴 「제야」이다. 그 시기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된 뒤 다시 처녀 시절의 습작 노트를 끄집어내어 본격적으로 시조 공부를 시작한 때였다. 당시의 정황으로만 보면 개인적 슬픔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시기였음에도 맨 먼저 다가선 곳이 고향이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에 제물을 두고 밤새기를 기다리나.[「제야」 네 수 가운데 둘째 수]
결혼을 하면서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첫 시가 고향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이영도의 정신에 뿌리내린 고향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고향의 여러 모습들 가운데서도 이영도에게 가장 큰 그리움의 대상은 역시 어머니였을 것이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 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달무리」 전문(『언약』, 1976)]
이처럼 이영도에게 어머니는 그리움인 동시에 마음의 빚이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 나게 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세상의 모든 절망이 일시에 멈춰지는 넓은 대지이자 끝없는 우주 그 자체이다.
이영도 시조의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흐름은 고독이다. 언제나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단아한 외모를 가꾸었고 다정다감한 성품이었던 만큼, 그를 스쳐간 세월은 언제나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었다. 끝끝내 떨쳐내지 못한 그 깊은 상처의 이름이 바로 고독이었다. 이영도 자신도 이미 수필 「봄의 서곡」에서 “의롭고 슬기로움이 항상 고독을 동반하기 마련이듯, 가장 아름다운 것일수록 크낙한 슬픔의 밑받침을 입고 있는 것”이라고 규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치명적 고독을 대하는 자세는 보편성과 상투성을 벗어나 독자적인 처방을 지니고 있었다. 고독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이기보다는 화해하고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보다 다양한 양태의 심상을 작품 속에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비」 전문]
『청저집』에 실린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 시에 해당되는데, 30대 중반의 나이에 겪어야 하는 개인적인 사모의 심사치고는 너무나 애잔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위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네 전통 방식의 그리움과 정서가 닿아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배가시킨다. 비가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진솔하고 정갈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기다리는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그러나 기약할 수는 없어도 그날이 있기 때문이다. 나직이 내리는 빗소리에서도 영성을 읽어 내는, 이런 자세가 이영도 다운 사모의 모습이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시]
이영도 시의 출발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대에 대한 진단과 역사 현실에 대한 고발에 초점이 맞춰져 갔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쓸었다//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보리 고개」 전문 (『죽순』 3집, 1946년 12월)]
여기에서 말하는 보리 고개란 우리 민족이 외세의 핍박에 시달리며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던 시대, 그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시기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시가 지어진 시대는 1946년으로, 일제 침략으로부터 해방된 바로 그 이듬해이다. 아직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미군정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처연한 모습의 일단을 이 시는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보리누름 철은 그야말로 풀뿌리로 연명해야 하는 가장 힘겨운 시기이다. 가을 추수에서 얻은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고 아직 보리는 채 익지 않아 아침마다 앞 다투어 감나무 밑으로 감꽃을 주우러 갔다. 주운 감꽃을 실에다 꿰어 약간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허기를 채우던 그 시절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혹시나 싶어 이미 양식이 떨어져 녹이 슬도록 버려 둔 가마솥을 열어 보는 그 힘겹던 시절이 마치 흑백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만큼 안타까운 시대 상황을 바라보는 이영도의 눈길이 예리하고 포근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치 고발성 시사 다큐멘터리 같은 「보리 고개」가 이영도의 초기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영도는 우리의 관념적 인식처럼 결코 자아 독백형 순정시를 쓰다가 사회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현실을 직시하는 시정신의 준열성이 남달랐던 것이다.
시인의 시대적 사명 가운데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수적이다. 물론 그 진단에 따른 정확한 처방전이 내려진다면 바람직하겠지만,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선은 오진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진을 피하기 위해서는 순리를 따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그 안목 안에는 보편적 가치가 들어 있고 민족관이나 역사관도 들어 있을 것이다.
이영도는 여러모로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비록 그 삶이 특정한 양태로 비쳐져 시대정신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역량이 가려진 게 사실이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시인들에 비해 차별화 된다. 그런 관점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진달래」와 「애가」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문학적 성과 면에서 이영도는 상당 부분 객관성을 침해당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시조가 확보한 시대사적 성과나 준열한 시정신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영도가 지닌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제약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단언한다. 우리 고시조에 황진이가 있다면 현대 시조에 이영도가 있다고.”라는 김동춘의 말처럼 문학 외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이영도는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그의 오라버니 이호우가 절벽처럼 버티어선 거부(拒否)의 시인이었다면, 그는 어스름에 타는 목련처럼 한향(寒香) 속에 젖어 있는 시인이었다.”라는 정완영의 말처럼 이호우와 비교해서 평가되곤 하였다.
황진이와 비교되거나 이호우의 영향을 거론한다고 해서 결코 이영도 시가 평가절하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으로 인해 독자적 가치가 훼손당할 개연성은 항상 열려 있다.
이영도 문학의 성과는 우선 생활 속에서 찾은 전통적 민족 정서를 시로 승화시켰다는 점이고, 다음은 개인적 정한의 정서를 보편적 시어로 환치시킴으로써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대와 시대 의식에 대한 끊임없는 진단으로 시조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의 그 감성 비평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이영도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서 민족 문학의 위상을 제고하고, 시조 문학의 방향성을 열어 나가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은상 시인은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맑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 시를 생활화하고 간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참모습을 전해 주는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시조집 『언약』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언제나 한복 차림으로 한국적 전통과 문명 비판적 가치관을 함께 아우르며 작품 속에 낱낱이 배태시켜 온 이영도의 삶은 시보다 더 시적이었고 시인보다 더 시인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삶의 개별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이영도의 시조는 객관적 평가의 공정성을 침해받아 왔다. 이영도의 시조가 거둔 성과, 즉 정형시 형식 질서를 가장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점이나 동서 문화의 대립 양상 속에서 한국적인 정신의 가치를 지향한 점, 시대의 아픔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찰한 점은 이제 이영도의 삶과 떼어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청도,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인을 기억하다]
생의 많은 시간을 청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였지만,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인이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청도는 그들에게 남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과 「開花」는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지천에서 꽃 잔치를 펼치는 5월의 청도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은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쁘라.[「살구꽃 핀 마을」 전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대로 담고 있듯 청도읍 내호리에는 그들의 생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946년 대구로 이사하면서 6촌 동생에게 팔고 갔던 집은 현재 아무도 거주하지 않지만, 매년 이호우와 이영도를 그리는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빈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 생가는 2006년 12월 4일 등록 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어 청도군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오누이 시조 시인의 생가가 위치한 내호리 일대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오누이 시비 공원’을 건립하였다. 2005년 1월 29일 제막식을 가진 오누이 시비 공원은 그들이 태어난 생가 앞의 오누이 소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소공원 내에는 높이 3m, 폭 5.5m, 두께 80㎝의 ‘이호우 시비’와 높이 3m, 폭 4m, 두께 80㎝의 ‘이영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호우 시비는 사각 기둥 형태로 만들어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문(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영도 시비는 옛 추억 속에 묻혀 있는 우리 고향, 그리고 고향에서 바라보는 달무리의 형상을 원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하였다.
청도가 낳은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인을 기리기 위하여 청도군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11월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이호우·이영도 시조 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청도군이 주최하는 것으로,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 시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더불어 2010년부터 시인의 시정신을 계승하고 젊고 유능한 시인을 발굴하고자 오누이 시조 신인상을 공모하고 있다. 당선작 한 편에 상금과 상패가 주어지는 이 행사는 이호우·이영도 문학 기념회가 주최하고 있으며, 매년 신인 시조 시인의 등단 기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