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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25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 - 임진왜란 종전
성격 왜란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에 침입하여 경상북도 청도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에 걸쳐 일본이 조선에 침입한 전쟁이다. 화의 결렬로 1597년 다시 침입한 정유재란을 포함해서 일컫는다.

[역사적 배경]

조선 건국 후 약 200년간 안정이 지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 초기 경상도 군사 체제는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 등 6개의 진관을 두었는데, 청도는 밀양, 경산, 하양, 인동, 현풍, 의흥, 신령, 영산, 창녕과 함께 대구 진관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립(代立) 현상들이 나타나자, 진관별 자전자수(自戰自守) 원칙을 포기하고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 침공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축성(築城) 문제로 백성들의 불만이 쌓이기까지 했지만, 부산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청도에서는 읍성을 비롯한 오례산성(烏禮山城), 철마산성(鐵馬山城)을 정비하는 등 나름대로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에 침입하여 세 방향으로 북상을 시도했다. 제1군은 1월 14일 동래를 거쳐 밀양·청도·대구·상주를 거쳐 조령을 넘는 중로(中路), 제2군은 경주·영천·안동을 거쳐 조령을 넘는 동로(東路), 제3군은 김해 죽도(竹島)로 상륙한 후 제4군과 합류하여 창원·함안·창녕·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는 서로(西路)를 택했다.

중로를 택한 제1군의 진격 상황을 살펴보면, 4월 14일에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여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김해·양산·울산·언양 등이 연이어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4월 18일에는 밀양이 함락되었고, 20일에는 왜적이 청도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이렇듯 파죽지세로 적이 침입을 하는 동안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 군대를 인솔하여 대구에 집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양에서 순변사(巡邊使)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왜적은 내륙 깊숙이 분탕질을 하고 있었으니, 제승방략 체제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부산을 침입한 지 겨우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인 5월 2일에 한양까지 점령한 왜적들은 각 장수들로 하여금 도별로 점령지를 분할하여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에 경상도는 제7군(軍)의 모리휘원(毛利輝元)과 그 휘하 장수들이 점거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의 낙동강은 왜적들의 보급로 역할로 매우 긴요했기에, 왜적들은 군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부산에 주둔하는 왜적 8,000명을 비롯하여, 동래·밀양 1,500명, 청도·대구 1,500명, 창녕 5,000명, 선산 1,500명, 문경 2,000명 등을 집중 배치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왜진왜란 초기부터 각 고을 수령을 비롯하여 수사(水使)와 병사(兵使)들까지도 전쟁을 피하기에 바빴고, 각 성안에 둔 병기와 곡식을 비롯한 전쟁 물자들도 태워버린 후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민심까지 크게 이반되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할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적의 수중에 넘어간 영남 지방이 사실상 분리되자, 낙동강을 기점으로 좌·우로 나누어 우도 감사에 김수, 좌도 감사에 김성일을 각각 임명했으나, 우도 백성들이 김성일을 유임해 줄 것을 청함에 따라, 우도 감사에 김성일, 좌도 감사에 한효순을 각각 임명하여 대처하게 하였다.

청도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였기 때문에 왜적의 제1군 본대가 휩쓸고 지나갔고, 바로 좌측에 제3군의 북상로가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 초기부터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기도 했다. 4월 20일에 쉽게 청도읍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는데, 이는 군수 배응경(裵應褧)이 경상도 순찰사(巡察使) 김수와 함께 대구와 청도를 사이에 둔 최정산(最頂山)[현 팔조령]으로 미리 피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직전에 전쟁 대비를 위해 수축한 읍성과 산성들이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왜적들은 경상 우도를 교두보로 삼아 호남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를 뜻대로 실현시킬 수는 없었다. 경상 우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큰 활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녕·합천·고령 등지에서 활약한 곽재우·정인홍·김면 등이 버티고 있었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활약 또한 컸다. 그런 반면에 경상우도와 이웃한 중로(中路)에 해당하는 청도를 비롯한 밀양·대구·선산 등이 적의 거의 유일한 왕래길이 되었고, 또한 청도 인근의 자인·경주 등지에서도 피해가 적지 않아 경상 좌도는 후방 기지 역할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전선 형성이 중로 중심으로 옮겨지자 청도 지역은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

이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 청도에는 지역에 기반을 둔 양반 사족들이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일찍부터 학적 기반을 토대로 한 사림 세력들이 대거 배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후예들이 유향소와 향약, 혹은 사창(社倉)을 통하여 백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울러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어서 의병에 소요되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가 있었다.

청도 밀양 박씨 가문에서 배출된 14의사(義士)가 4월 23일 운문산 아래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고, 이에 동조한 이득복(李得福), 이정욱(李廷郁) 등도 산서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한편 왜란 당시 대구에서 청도로 이주하여 의병을 조직한 경주 최씨 가문의 최여준 등도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밀양 박씨 가문에서 조직한 의병진들 중에 박경전선조에게서 청도 조전장(助戰將)으로 임명받아 내려온 종형 박경신과 함께 청도를 지키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들의 의병 활동은 이웃 고을인 자인(慈仁) 의병장 최문병(崔文炳)과 연합하여 이듬해 명군이 합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 일본군과 명군의 화의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졌고, 1597년 화의가 결렬되어 다시 침입한 정유재란 때까지 의병활동은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왜적들이 침입하여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들이 해전에서 승전하여 적의 보급로를 적절하게 차단하였고, 각 지역별 의병들의 활동이 크게 일어나 전쟁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 국난 극복의 역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도를 지키기 위해 함께 창의 한 밀양 박씨들은 후에 박경신[선무원종공신 1등], 박경전[선무원종공신 2등] 등 11명이 공신에 책봉되었고, 아울러 함께 창의한 반효홍(潘孝泓) 등도 원종공신에 봉록되어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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