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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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雲龍 |
이칭/별칭 | 경견,동계,식성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이운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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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5년 - 이운룡 무과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이운룡 옥포 만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이운룡 옥포 해전에서 수훈을 세움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이운룡 웅천 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이운룡 통정대부로 가자됨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이운룡 경상 좌수사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이운룡 선무공신 3등에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이운룡 충청 수사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10년 - 이운룡 사망 |
출생지 | 이운룡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
묘소|단소 | 이운룡 묘소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산30-1 |
사당|배향지 | 금호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 |
사당|배향지 | 기강 서원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웅곡 |
사당|배향지 | 충현사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재령 |
대표 관직 | 수군 통제사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출신의 무신.
[개설]
이운룡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옥포 만호로 있으면서 패전한 원균(元均)을 대신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의 막하에서 여러 번 싸움에 나아가 큰 전공을 세워,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오랑캐가 북쪽 변방에 침입했을 때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가 되어 적을 진압했다.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견(景見), 호는 동계(東溪). 아버지는 남해 현령을 지낸 이몽상(李夢祥)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밀양 변씨(密陽卞氏)이다.
[활동 상황]
이운룡(李雲龍)[1562∼1610]은 24세이던 1585년(선조 18)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병조 판서 유성룡의 후원으로 1587년 무반 청요직인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89년 옥포 만호에 제수되어 복무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선을 맞아 싸웠는데, 이운룡은 선봉장이 되어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이 바로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보를 울린 옥포 해전이다. 그 뒤 사천·진해·한산양·안골포·부산해 등 여러 해전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워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왜적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웅천 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5년 통정대부로 가자(加資)[공로로 계급을 올려 줌]되었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 좌수사에 승진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도총부 부총관, 경상 우수사 겸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등을 역임했고, 1607년 북방의 방비가 급해지자 비변사의 천거로 함경남 병사(咸鏡南兵使)로 전직되어, 기병 별대를 창설하고, 갑산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이어 1609년(광해군 1)에 충청 수사로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체직(遞職)되어 청도인 고향으로 돌아와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임진왜란 참전 당시를 기록했던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 2권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법귀산(法龜山) 선영에 있었으나 1630년 이운룡의 아들 평택 현감 이암에 의해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웅곡(熊谷)으로 이장했다.
[상훈과 추모]
증직으로는 자혜대부 병조 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받았다. 신도비(神道碑)와 기적비(紀蹟碑)는 전서지인 충무에 건립되어 있다. 청도 금호 서원(琴湖書院), 의령 기강 서원(岐江書院)에서 배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