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어갱이들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A020103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호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해평은 요즘 ‘서울 강남의 8학군’과 같은 곳으로 정신문화의 중심지인 영남사림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전주최씨의 해평 입향조인 검재(儉齋) 최수지(崔水智)성종 때 처향인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조선시대 전후의 역사를 보면, 해평은 격전지의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해당하는 조건 때문이다. 고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변방으로 김천을 넘어서면 후백제 땅이고, 상주 위로는 고려 땅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팔공산에서 벌인 공산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그곳에서 신숭겸왕건의 옷을 입고 왕건을 대신해 죽었으며, 반야월까지 도망가니 반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안심면 지역까지 왕건은 도망하여 비로소 안심하였다고 하여 오늘날 그 지명이 안심면이 되었다고 한다. 선산 앞들을 여기 사람들은 ‘어갱이들’이라고 하는데, 어갱이들은 왕건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했다 하여 어검평야로 부르기도 한다. 도리사 뒷산을 태조산이라고 한다. 원래 거기에는 태조산성이 있었다. 그만큼 견훤왕건이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 해평이다.

조선시대에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영남대로가 해평을 지났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실제로 총을 겨누고 싸운 곳은 이곳이 처음인데, 상주의 북촌까지 밀리어 그곳에서는 조선군대가 완전히 왜군들에게 패함으로써 왜군들은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까지 쉽게 북진할 수 있었다. 북촌에서 공훈을 세웠던 사람들이 선산김씨들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동학혁명 때는 해평병참부 설치 전후로 각각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공세를 받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도 일본학자들이 동학과 관련하여 마을에서 사진을 찍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가장 싸움이 치열했던 격전지 중의 한 곳이 낙동강 전선으로 바로 구미·선산 지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낙동강을 중심으로 해평을 비롯한 이곳 주변지역은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지만 영남대로를 비롯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각종 세력들이 서로 충돌하는 격전지로서의 역사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9.07 내용 변경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이곳 선산전투에서 패함으로써 팔공산으로 도망갔으며, →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팔공산에서 벌인 공산전투에서 패함으로써, | 어갱이들은 견훤들로 어검평야로 부르기도 한다. → 어갱이들은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했다 하여 어검평야로 부르기도 한다.
2023.09.01 내용 변경 조선후기 동학혁명 때는 동학 농민이 상주를 공략하기 위해 이곳 해평에서 준비를 하였고 역시 싸움도 치열했다. → 조선후기 동학혁명 때는 해평병참부 설치 전후로 각각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공세를 받았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