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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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사람이 죽으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시신을 거둔다. 임종이 확인되면 초혼을 부른다. 초혼을 하고 나면 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빈소를 차리고 집안 식구들이 모인 가운데서 염을 한다. 시신을 잘 닦고 손발을 거두며, 몸이 뒤틀리지 않도록 잘 묶는다. 대렴을 마치고 나면 성복을 한다. 옛말에 ‘성복제 지내고 약 공사 한다’는 말이 있다. 성복제를 지냈다는 것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의미인데, 이미 죽은 사람을 보고 생전에 무슨 약을 썼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인데 라며 후회를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상주들은 성복제를 하기 전까지 상복 두루마기를 반만 걸쳐 입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왼쪽 팔을 빼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른쪽 팔을 빼고 입는다. 이는 부모가 돌아가신 것이 마치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머리에 쓰는 굴건도 위를 바느질하지 않고 틔운 채로 통건으로 쓴다. 성복제를 하고 나면 그제야 팔을 마저 끼고, 통건을 봉합한 다음 굴건제복으로 갖춘다.
성복제를 지낸 다음에는 영정을 모시고 빈소를 차린다. 빈소를 차린 다음에는 대소가뿐만 아니라 조문객들을 받는다. 이때 상주가 입고 있는 상복의 형태, 지팡이 등으로 죽은 이가 누구인지 판단할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마디가 있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마디가 없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머리에 쓰는 굴건에 띠를 두르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가공하지 않은 삼을 수술로 달아 내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삼베를 잘라 수술을 단다.
요즘은 다 ‘깨지고(단절되고)’ 없지만 예전에는 ‘초령계(초롱계)’, ‘생이계(상여계)’가 있어서 상가의 일을 서로 도왔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초롱을 달아 상가를 밝혔다. 초령계에 가입된 사람들은 생이계에도 같이 가입된다. 마을이 크기 때문에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따로 계를 만든 것이 서너 개 정도가 된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계원들은 모두 상가로 모인다. 이때 계원들은 각각 쌀 한 되, 초 한 갑을 모아 상가에 가져다준다. 부고를 돌리는 것에서부터 손님접대나 상가의 모든 일을 돌봐주는데, 장사가 끝날 때까지 일을 돕는다. 상가에 사람이 없으면 쓸쓸하기 때문에 밤마다 돌아가며 상주들과 함께 마당에 불을 피우고 밤을 샌다.
여자들은 방에 모여 앉아 상주들이 입을 상복을 만들어 내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의 일을 한다. 상복은 상가에서 미리 마련해 둔 상포를 이용하는데, 상포는 평소 삼 농사를 지어 짜 놓은 삼베로 어른이 환갑을 맞을 무렵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이때 상포와 수의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옛말에 ‘칠순에 고려띠에 육십에 한숨 못 살쏜가’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옛날에는 칠순에 고려장을 했던 풍속이 있는데, 육십을 못 넘기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환갑 즈음에 수의와 상포를 마련하는 것도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다. 수의는 보통 환갑 때 좋은 날이나 윤달에 많이 마련하였다.
초상이 나면 마름질을 잘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재단을 하면 나머지는 재봉한다. 여럿이 한꺼번에 하기 때문에 마름질만 빨리 끝나면 하루만에도 상복을 다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제 초상이 나면 원 상주만 상복을 지어입고, 나머지 조카나 사위 등 친척들은 주변에서 상복을 빌려 입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원 상주도 만약 아버지 때 입었던 상복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다시 꺼내 입는다.
계원들의 부조나 일을 거는 것 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웃에서 따로 부조를 하기도 하는데, 주로 팥죽을 쑤어주며 요즘처럼 돈으로 하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상주가 너무 애통하여 밥이 잘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여 팥죽을 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팥죽은 잡귀를 쫓아내기도 하기 때문에 죽은 이가 혼백이 되기 전까지 나쁜 기운들을 쫓아내는 기능도 한다. 팥죽은 상주뿐만 아니라 문상을 온 손님들에게도 대접되었다. 그러나 성복제를 지낸 다음에는 더 이상 상가에 팥죽을 두어서는 안 된다. 즉 성복제가 지나고 나면 더 이상 팥죽을 먹지 않고 그때부터 밥을 먹기 시작한다.
출상하기 전날 저녁이 되면 계원들이 모여 상여를 받치는 원채를 만들어 출상준비를 한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면 실제 상여는 얹지 않고, 원채만 들고 실제 상여가 나가는 것과 같이 앞소리를 메기며 상여를 멘다. 이를 ‘대구리(대우리라고도 하며, 빈 상여놀이의 의미이다)’라고 하는데 상대꾼들이 상주들에게 돈을 우려내기도 하는 일종의 빈 상여놀이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출상할 때 실수가 없도록 미리 자리를 채우고 연습을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여는 모두 24명이 메는 것으로 규모가 컸다. 마을에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못 밑과 마을 안에 모두 두 군데가 있었다. 평소에 상여를 해체하여 궤짝에 넣어두고 원채는 따로 보관하였다. 상여집은 계에 따라 따로 사용하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상대꾼들은 상가에 모여 아침을 먹은 다음 전날 맞춰 본대로 자리를 잡아 상여를 멘다. 상여 첫머리가 나가면서 발인제를 지낸다. 산에 오르면 땅을 파기 전에 참파제를 지내는데, 모인 사람 가운데 깨끗한 사람이 맡아 한다. 땅을 다 파고 시신을 묻기 전에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 역시 깨끗한 사람이 해야 한다. 봉분을 올린 다음에는 평토제, 집으로 돌아오면서 반혼을 한다.
매장을 하고 난 다음 처음으로 올리는 제는 초우이다. 초우를 지낸 다음날 재우를 지내고, 사흘째에 삼우를 지낸다. 그리고 난 다음 일주일째 제를 다 마쳤다는 의미로 졸곡을 지낸다. 그 다음부터 삼년을 모신다. 이때 상주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리며 곡을 한다. 이를 상석을 드린다고 한다. 삼년상을 하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기존의 상석보다는 더 큰 규모로 제를 올리는데, 이때는 대소가가 모인 가운데, 편과 떡 등을 차려 마치 제사와 비슷한 규모로 상석을 드린다.
삼년상을 마치고 나면 혼백을 매혼하기 위해 다시 장지로 향한다. 매혼을 하고 나면 부사를 지낸다. 부사란, 죽은 이가 조상 곁으로 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윗대 조상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여 먼저 모셔놓고, ‘조부(조모)님, 우리 아버지(어머니) 잘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기원한다. 그 다음 망자를 위한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 그 영혼이 윗대 조상에게 따라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