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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을 위해 상소를 올린 낙남 최산휘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A030104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호

인재 최현의 아들인 최산휘(1585~1637)는 부친이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무고함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으며, 부친이 투옥된 다음 해,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을 알려 영사공신(寧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해군(完海君)으로 책봉되었다.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하사받은 전토(田土)와 노비를 모두 반환하여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청송부사(靑松府使) 때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 왕에게 분문(奔問)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53세로 사망했다. 낙남 최산휘에 대해 전주최씨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字)는 백옥(伯玉) 호는 낙남(洛南) 인조 때 공훈으로 녹녕사공신(祿寧社功臣) 봉(封) 완해군(完海君) 갈충효성병기익(竭忠效成炳畿翊) 명하다.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를 지내고 인재공(訒齋公)이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문경에 주유(駐留)할 때 부명(父命)으로 단기(單騎) 부경(赴京)하여 어전(御前)에 분문(奔問)하니 인조(仁祖)가 특사영정(特賜影幀)하고 공이 귀로(歸路)에 서거(逝去)하니 사제문(賜祭文)하고 불천위(不遷位)를 특시(特施)하였다. 해평군동(海平軍洞)에 수묘(修墓)하고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使) 시효헌공(諡孝憲公)하다. 시주(諡註)에는 사친진절(事親盡節)은 효(孝) 박문다능(博文多能)은 헌(憲)이라 하였다. 충훈부(忠勳府) 19공신회맹록(十九功臣會盟錄)에 등재(登載)되고 단서철권(丹書鐵券)은 불천묘(不遷廟)에 봉안되다.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갈문(竭文)을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墓誌)를 대제학(大提學) 남병철(南秉哲)이 시장(諡狀)을 쓰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영덕(盈德)주(朱)씨는 현감 윤(贇)의 손(孫)이다.

낙남 최산휘가 남긴 『낙남집((洛南集)』에는 이인거의 난에 연류되어 투옥된 아버지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상소한 글 ‘송부원소(頌父寃疏)’와 1628년 유효립의 난을 평정한 데 기여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는 것을 사양한 ‘사훈소(辭勳疏)’ 및 청송군(靑松郡)의 군액을 줄여줄 것을 간청한 ‘청감청송군액소(請減靑松軍額疏)’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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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23.08.31 내용 변경 평완군(平完君) → 완해군(完海君) | 청송부사(靑松府使) 때 53세로 죽었다 . → 청송부사 때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 왕에게 분문(奔問)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53세로 사망했다. | 1628년 유효립의 난을 평정한 데 대한 포상으로 평완군(平完君)에 책봉된 것을 사양한 사훈소(辭勳疏)’ → 1628년 유효립의 난을 평정한 데 기여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는 것을 사양한 사훈소(辭勳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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