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B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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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석대권 |
택호가 이문댁이다.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이문동이라는 마을에서 시집와서 그렇게 부른다. 택호는 마을 어른들이 지어주었다. 동네에 시집오면 친정 동네 이름에 따라 택호를 지어준다. 새댁일 때는 내 택호를 부르지 않고 시어머니 택호를 불렀다. 사람들이 날 ‘사남댁이 새댁’이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내 택호를 불렀다.
[엄마 없이 오빠와 나를 키우셨던 아버지]
엄마 얼굴도 모르고,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른 채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키웠다. 아버지는 성질이 별나서 재혼도 안하고 살다 내 나이 25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없어서 혼례준비를 내 손으로도 할 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곤 했다. 오빠하고는 여섯 살 터울로 6·25사변 때 군대 가서 다리를 잃어 상이군인이 되었다. 시집오기 전에는 일할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 일하는 데 가서 눈치껏 거들어 주기만 했다.
[혼례 치르고 나자 바로 군에 갔던 남편]
1955년 21살에 결혼을 하였다. 옛날에는 21살이면 시집가는 나이로는 많은 편이었다. 지금은 20살이면 ‘얼라(아이)’로 취급하지만 그때는 노처녀였다. 보통 18, 19살에 결혼을 했다. 내가 좀 늦은 택이었다. 중매로 혼례를 올렸는데, 남편 집안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중매를 섰는데, 친정집 윗마을에 살았다. 아버지가 어디 간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그게 선을 보는 자리였다. 어른들끼리만 혼사이야기를 주고받을 뿐 당사자들은 혼례를 치르는지도 몰랐다. 남편의 집안이 굉장히 가난하여 오빠가 반대를 했는데, 아버지가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이라고 해서 시집을 보냈다. 남편의 집안은 ‘진성이씨’로 원래 고향은 ‘봉한리’였으나 외가인 원호리로 ‘처가꼬지’로 들어와 살았다.
친정에서 혼례를 치르고 3일 만에 시댁에 왔다. 그걸 ‘신행 간다’고 한다. 그리고 시댁에 온 후 처음으로 친정가는 것을 ‘첫친정 간다’라고 하는데, 나는 첫친정을 설에 갔다. 친정에 가면서 남편하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첫 친정 다녀오고 3월에 군대에 입대를 하였다. 군대간 남편은 3년 만에 제대했다. 남편이 군대 갔을 때 시집와서 가장 많이 배를 곯았다. 군에 가 있는 동안 시부모님 모시고 논산으로 면회하러 한 번 가 보았다. 남편이 군에 갈 무렵에 첫째가 들어섰다. 그 때 애가 들어서서 그런지 유독 오징어를 맛있게 먹었던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남편이 보고 마음에 걸렸던지 오징어를 몇 마리 사주고 갔다. 그렇게 챙겨주고 가도 하도 없이 살던 시절이라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징병된 사람들이 고아읍에 모여서 갔었는데, 다른 새댁들이 눈물을 흘리고 울어도 나는 독이 올라서 울지도 않았다. 그래서 날 매정하다고 했다.
[시집와서 너무 힘들어서]
시집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았다. 가운데 있는 ‘봉당’ 양쪽으로 방이 한 칸씩 있었는데, 시부모님이 한 칸 쓰고 남편하고 내가 한 칸을 썼다. 없는 살림에 살려고 남의 일도 다니고, 장사도 해봤다.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죽 끓여먹고, 나물 뜯어다가 불린 곡식에 같이 끓여먹었다. 겨울에는 시래기 삶아서 죽을 끓여먹었다. 아침에 밥을 먹고 나면 나머진 죽이나 고구마로 때웠다. 그때도 세끼는 다 먹었다. 쌀이 없다보니 무채를 썰어서 거기에다 쌀을 조금 넣고 ‘무밥’을 해 먹었다. 무밥도 밥이라고 해서 먹었는데, 지금은 무 먹기도 질린다. 고구마 이파리를 넣고 국수 삶아먹기도 했다. 첫째 아이 가졌을 때에는 밭이 없어서 남의 밭을 빌려서 무시(무)를 심어 먹었다. 또 들에 다니다 성한 무나 배추가 있으면 주워다가 먹었다. 시집왔을 때 시댁이 남의 집을 살아서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봄에 보리가 날 때가 가장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시어머니는 남의 집에 일을 하러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남의 집에 가서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하고 옛날 부잣집 종처럼 그렇게 일했다. 시아버지는 나무 해다가 때고 대나무 베어다가 빗자루 만들어 장에 가서 파는 일을 하였다. 남편이 군대 갔다 와서 남의 집을 살았는데 그 세공을 받아 농사지을 땅을 하리로 샀다. 한 해 농작물을 수확하면 그 수입으로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짓는데 그것을 ‘하리’라고 한다. 하리로 땅을 사서 나락 농사를 지었다. 땅 한 평에 1,500원도 하고 2,000원도 했는데, 그것이 차츰 올라 11,000도 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을 때, 나락 두 섬을 수확하면 한 섬을 주는 식으로 반반 ‘갈라먹기’를 했다. 집에 농사 일이 적기 때문에 아침 일찍 먹고 나가서 내 집 일을 먼저하고 일이 끝나면 하루 종일 남의 집 농사일을 하러 다녔다. 송아지를 사다가 먹여 키워 내다 팔기도 했는데 그 돈을 보태 논을 샀다. 소는 ‘구미장’에 가서 팔았다. 남편 군대 갔을 때에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장사하러 돌아다녔다. 동네에서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같이 다녔는데, 대구에서 미역, 김, 사과 등을 떼다가 팔았다. 사과 팔러 대전까지 가봤다. 아무거나 닥치면 일을 해야 했던 시절이라 무서운 것도 몰랐다.
그 시절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힘들게 살았다. 죽으로 끼니를 연명하는건 다반사고, 어떤 집은 지붕에 얹은 짚을 끄집어내어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팔기도 했다.
[친정에서 첫째를 출산하고]
자식들은 4남매를 두었다. 아들-아들-딸-아들, 아들 셋에 딸 하나이다. 첫째는 23살에 낳았는데, 아이를 배었을 때 꿈속에서 고구마와 고추를 막 주어 담았다. 고구마와 고추 꿈을 꾸면 아들이라고 했는데, 낳고 보니 정말 아들이었다. 딸을 가졌을 때는 새파란 뱀을 보았다. 막내는 동네 담당 순경이 ‘삽작거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낳았는데, 꿈에서 사람이 보여 아들인 것 같다.
친정엄마가 없어서 시집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없이 살아도 어른들 잘 모셨다고 고아면에서 효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놋그릇을 한 벌 받았다. 면에서 상을 받으러 오라고 했는데 안가서 동장이 집으로 가져다주었다. 상을 받아도 기쁘지도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도 몬(못)했는데 이런건 뭐하러 주노”했다.
첫째 아이하고 둘째는 5살 차이가 난다. 첫째아이가 들어섰을 때 남편이 군대 가서 두 아이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둘째와 셋째, 넷째는 모두 연년생이다. 첫째 아이로 아들을 보았을 때 시부모님이 좋아하셨다. 시어머니가 다정다감하거나 챙겨주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 낳고 산바라지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 출산을 하면 애를 낳는가보다 여길 정도로 태평했다. 임신한 후 음식이나 행동을 특별히 조심한 것은 없었는데, ‘상어고기’를 먹으면 아기 피부가 껄끄러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큰 아이는 친정에 가서 낳았다. 원래 친정 가서 낳을 생각이 없었는데, 그 때 상황이 친정에 나이가 한 살 많은 올케가 있어 젊어서 아이 놓고 하는 것을 잘 몰라 옆 집 할머니와 올케가 산바라지를 해 주었다. 친정아버지가 애기 놓고 바로 시댁에 가면 없는 살림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고 하여 시댁으로 못 돌아가게 했다. 친정아버지의 만류도 있고, 나도 시댁에 가기 싫어서 백일 때까지 친정에 머물렀다.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시댁에서 데리러 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시어머니한테 “딸을 평생 데리고 살라는 모양이다”라는 타박도 들었다. 남편은 애기 낳고 한 7일 지났을 때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명태, 미역을 사가지고 친정으로 나를 보러 왔다. 백일쯤 되었을 때 시댁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남편이 또 휴가를 나와서 남편 따라 시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도 “이서방도 왔는데 애 데리고 가라”고 하셨다.
큰 애를 낳았을 때 친정아버지가 탯줄을 잘라주었다. 옛날에는 탯줄을 부엌 아궁이에다 태웠다고 하는데, 친정아버지는 어디에다가 갔다 묻었다. 산바라지를 해주던 이웃 할머니가 이틀 동안 물 한 그릇 떠놓고 삼신상을 차려주었다. 남들은 며칠씩 몸조리 했다고 하던데 나는 몸도 가뿐하고 뒷바라지를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금방 일어나서 애기 기저귀도 빨고 목욕도 씻기고 혼자 다 했다. 올케가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아버지가 오빠에게 명태를 사오라고 시켰다. 오빠가 사온 명태를 내게 주시며 직접 뚜드려서 내 손으로 끓여먹으라고 하셨다. 올케가 끓여줬을 때는 맛이 없어 못 먹었는데, 내가 끓이니까 맛이 있어서 잘 먹었다. 아이 기저귀로 쓸 천이 없어서 헌옷 떨어진 것을 썼다. 백일옷(배냇저고리)도 헌 옷으로 지었다. “우리 아들 키우면서 기저귀 한 번 몬해봤다. 시집이라도 그렇고.” 첫째 밑으로는 다 시집에서 낳았다. 첫째 낳고 나서 몸이 가뿐하여 바로 살림을 했었는데, 그때 몸조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 늙으니까 다 병으로 온 것 같다. 바람이 불면 등이 시려 못 앉아있고 자꾸 옷을 껴입어야 한다. 시댁에서 아이들을 낳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만삭인 몸으로 집안일도 해야 하고 농사일도 해야 하고 몸이 항상 피곤했다. 막내 놓을 때 기계타작 하기 위해서 나락을 묶어 한쪽에다 재워놓고, 물이 없어서 샘에 물을 길러 갔다 왔는데 세 번째 다녀올 무렵 못 움직일 정도로 산통이 왔다. 그 때가 저녁 8시, 9시 경 되었다. 애기가 나올 것 같아 일손을 놓고 방에 들어갔는데 방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막내가 태어났다. ‘돌가루종이(시멘트포장지 같음)’를 깔고 애를 낳았다. 시어머니는 한 번 잠이 들면 제사를 지내도 못 일어날 정도의 성격이어서 막내 낳을 때 남편이 산바라지를 해 주었다. 없는 살림이어도 아이들 돌은 챙겨주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돌떡으로 ‘백찜’을 해서 이웃에게 돌리기도 했다.
[큰 병치레 없이 잘 자라준 자식들]
워낙 살림이 어려워서 남편하고 사뭇 남의 집 일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 넷 모두 구미에서 학교를 다녔다. 큰아들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둘째, 셋째, 넷째는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큰아들은 전화국에 취직해서 번 돈으로 야간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막내가 머리가 좋아서 개인적 욕심으로 공부를 더 시키고 싶었는데, 공부를 계속 안해서 아쉬웠다. 아이들이 모두 순하고 큰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아 키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네 아이 모두 건강하게 자라줘서 큰아들 머리에 부스럼이 났을 때 병원에 한 번 다녀왔을 뿐 병치레 때문에 고생해 본적이 없다. 동네에서 “저 집 아들들은 잘 큰다” 라는 말도 들었다. 큰아들은 공부하려고 애를 많이 쓴다. 둘째 아들 성격이 다정다감해서 집안일을 잘 도와줬다. 욕심도 많아서 어렸을 때부터 농기계 다루는 것도 일찍 배우고 일도 곧 잘했다. 지금도 틈틈이 집에 와서 내 살림을 돌봐준다. 첫째는 대구, 둘째와 셋째는 구미에, 막내는 인천에 산다.
[갑자기 돌아가신 시부모님]
시아버지는 78세에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 없이 건강하게 지내셨는데, 갑자기 하루사이에 건강이 안 좋아지시더니 손쓸 겨를도 없이 숨을 거두셨다. 돌아가시던 날 모처럼 마을 새댁들이 8명 정도 모여 직지사에 놀러 갔다 왔는데, 시아버지가 매일 일만 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보내주셨다. 그 날 집에 돌아온 후 이것저것 치우고 비가 와서 집안으로 살림살이 들여놓고 일을 했는데, 일하는 동안 시아버지가 큰 방으로 안가시고 내가 자는 방에 누우셨다. 일을 끝내놓고 방으로 들어가니 멀쩡하셨던 분이 갑자기 말씀도 못하시고 몸이 뻣뻣하게 굳으셨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바늘로 손가락을 따고 주무르고 했는데, 손발이 이내 싸늘해졌다. 낮에 꼴망태 가지고 꼴 뜯으러 가셔서 놀다 오셨다고 들었는데, 저녁에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게 될 줄 몰랐다. 시아버지의 장례는 마을의 ‘초롱계’에서 도와줘서 3일장을 치렀다. 시아버지는 평소에 말씀이 별로 없으셨고, 인정도 그렇게 후덕하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에 비해 성격이 좀 드센 편이었다.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시집살림을 가르쳐 주지 않아 내 방식대로 터득해서 살림을 꾸려나갔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 1년 정도 있다가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도 평소에 밥 잘 잡수시고, 담배도 즐기며 피우셨는데 시아버지처럼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시더니 하루 만에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작은 집 시동생이 대구에서 혼례를 치렀는데 시어머니가 나보고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서 다녀 온 이야기를 시어머니께 말씀 드리면서도 시어머니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저녁에 남편이 들에 다녀온 시어머니께 술 한 잔을 따라 건네 드렸는데, 시어머니가 술잔을 받으러 손을 뻗었다가 도로 손을 오므리시고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남편이 “엄마 술 받으러 오다가 왜 도로 가요?” 물었는데 대답도 안하시고 바로 말문을 딱 닫아버리셨다. 그때는 병원이 흔하지 않아서 ‘송림리’라는 인근 동네로 의사를 데리러 갔었는데, 그 사람이 시어머니 증세와 나이를 듣더니 오지 않으려고 했다. 시어머니는 병명도 모르고 원인도 모른 채 그 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그 때 연세가 72세였다.
시어머니가 성주와 영등할머니를 모셨는데, 당신이 돌아가시면 다 치우라고 하셔서 물려받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살림에 솜씨가 없었다. 시집오니까 단지에 시커멓게 담가놓은 김치가 가득 있었는데, 얼마나 짜던지 먹지를 못했다. 남편도 시댁김치보다 친정김치가 맛있다고 친정김치를 더 좋아했다. 가을 고사떡을 할 때도 떡을 못해서 ‘두드기떡’이 되었다. 떡이 찰진 게 아니라 만지면 부서져 버렸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남편]
남편은 47세 세상을 떠났는데,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셔서 병이 생겨 떠난 것 같다. 묘는 ‘점터’ 공동묘지에 있다. 지금 부대가 있는 곳에 집안 대대로 묘를 써 와서 그곳에 묘를 쓰려고 했는데, 그 때 부대가 한참 확장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 점터 공동묘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부대 있는 산이 원래 진성이씨 선산이라고 들었는데 옛날 어른들이 다 팔아먹었다고 한다. 시부모님 묘도 부대 있는 산에 있다. 남편 묘자리가 행여나 부대부지로 들어갈까 염려스러워 그렇게 했던 것인데, 우려와 달리 부대 부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늘 마음이 죄스럽고 편하지 못하다. 남편이 죽었을 무렵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살림이 갑자기 힘들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살아서 나는 환갑잔치도, 칠순잔치도 안했다. 남편은 시아버지 성격을 닮아서 평소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성품이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싸웠지 그 이외에는 싸울 일이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아홉 마지기 농사를 혼자 다 지었다. 일손이 부족하면 품을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나중에 돈을 모아 땅을 좀 더 살 수 있었다. 시집 와서 “저 집에 며느리 업들어 왔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들어오니까 이씨 집안이 좀 나아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