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C030102 |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삼문 |
승지공[휘 熙]은 중종 8년(1513) 서울 남문 밖에서 나서 20세경에 부친[휘 繼曾]을 따라 성주로 귀향하였다. 부친은 다시 형 열(烈)을 데리고 인동으로 환향하였으므로 암포에 남아 옛집을 지키게 되었다. 여기서 아들 현도(顯道)가 나고 손자 5형제가 났다.
승지공은 경사(經史)를 두루 익히고 박학다식하여 널리 회자되었다. 자가 언여(彦汝)이고, 호는 전하지 않으며 충순위에 봉직하였다.
승지공 아들의 휘는 현도이고 자는 덕우(德優)이며, 호는 월포(月浦)이다. 그래서 남산파 내에서는 월포공으로 통한다. 월포공은 명종 18년(1563년)에 성주 암포에서 나서 인조 12년(1634)에 암포에서 서거하였다. 월포공은 성품이 강명(剛明)하고 정직한 기상이 있었고 자질이 온량(溫良)하고 순후(淳厚)한 덕이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한강 정구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재지(才知)가 영민(英敏)하고 학문이 순숙(純熟)하여 한강 선생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암포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였고 어려울 때에는 사촌형[여헌]에게 의지하였다. 여헌 선생의 피란록[용사일기]에 의하면 ‘현도가 성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 형세가 궁하고 생계가 메말라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내가 애처롭게 여겨 우선 내 우소에서 잠시 머물게 하였다.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가 대과에 급제하여 모두 통정대부 이상을 제수 받았다. 그래서 셋째 아들의 존귀로 인하여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후손들이 재물을 추렴하고 힘을 합해 공을 위하여 양양재(洋洋齋)를 짓고 사방 흩어진 자손들이 4월 첫째 일요일에 모여 석채(釋菜)를 올리면서 추모한다. 양양재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인데, 이는 공의 출계(出系) 10대손(청천당의 9대손)인 인원이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대원군과 친분이 있어서 받아 온 것이다.
월포공의 맏아들은 휘가 봉일(奉一)이고 자는 경보(經甫)이며 호는 청계(聽溪)이다. 일찍이 종숙 여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많은 훈도(訓導)를 받아 학문이 성숙하였으나 수(壽)를 얻지 못하여 대성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조 19년(1596)에 나서 인조 6년(1628)에 졸하니 향년이 33세였다.
여헌 선생은 종질의 죽음을 애통하고 원통해 하면서 ‘나는 실로 너 보기를/네 아우[자신에게 양자 온 응일]와 다름이 없이 하였으니/네가 나를 보는 것이/또한 어찌 네 아우가 나에게 의지함과 달랐겠는가/이제 너를 잃었으니 어찌 다만 네 부친이 아들을 잃은 것뿐이겠는가/나 역시 한 아들을 잃은 것이다/그 애통함이 어찌 딴 사람의 숙질간과 같을 뿐이겠는가’ 하면서 아들과 조카가 없는 자기로서는 종숙질(從叔姪)의 정의를 넘어서 부자간의 정의로 대하였음을 토로하고 있다.
더불어‘너의 재주가 졸(拙)한 듯 하였으나/부박(浮薄)하고 잡된 습성이 없었으며/조급한 듯하였으나/거칠고 어그러진 행위를 심히 미워하였으며/약한 듯하였으나/오히려 정하고 강한 지조를 지켰으니/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하면서 종질의 인품을 말하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청계공[봉일]은 아들이 3형제인데 맏이 진(鎭)의 자는 중세(重世)이고 종사랑(從士郞)이란 품계가 전해지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당세 사류(士類)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자손은 성주 암포에 살기도 하고 혹은 딴 지방으로 옮겨 갔는데 주로 진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탁(鐸)은 자가 자진(子振)이고 호는 요산(樂山)이며 성균 진사(成均進士)이다. 진북면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자손은 경남 함안과 사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셋째는 용(鎔)인데 자는 형서(荊瑞)이고 공조참의를 지냈다. 인조 2년(1624)에 출생하여 숙종 13년(1687)에 서거하였다. 이 어른이 청도 입향조로 후손이 함박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매우 번성하다.
월포공의 둘째 아들의 휘는 응일[應一, 호 청천당]인데 종형[여헌]에게 양자를 보냈고, 셋째 아들의 휘는 우일(遇一)이고 자는 경중(經仲)이며, 호는 귀로정(歸老亭)이다. 광해 9년(1617)에 출생하여 숙종 34년(1708)에 서거하시니 향년이 92세였다. 현종 원년(166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11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찰방, 사헌부 감찰, 고성현령, 성균관 사예, 장악원 정, 승문원 판교, 봉상시정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그리고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만년에 조그마한 정사를 짓고 소요하면서 한가하게 여생을 보냈다. 성질이 돈독하고 학문이 깊어서 사림에서 추중을 받았다. 맏아들 선(銑)은 무과에 급제하여 남해현령을 지냈다. 그 후손은 인동을 중심으로 칠곡군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둘째 아들 집(鏶)은 숙종 15년(1689)에 사마별시(司馬別試)에 합격하였다. 셋째 아들 연(鍊)은 수직으로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제수 받았다.
넷째 아들의 휘는 회일(會一)이고 자는 경수(經叟)이다. 종6품 선교랑(宣敎郞)의 품계만 전하고 관직은 알 수 없다. 아들 호(鎬)는 삭주(朔州)부사를 지냈다. 다섯째 아들은 휘가 유일(有一)이고 자는 경원(經元)이며 통덕랑(通德郞)이다. 손자 만추(萬秋)가 갑산(甲山)부사를 지냈고, 현손 지선(趾善)은 훈련원 봉사(奉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