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D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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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신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진 |
[구미공업단지 조성 당시의 상황]
박정희 정권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이라는 개혁운동으로 우리나라 전역에는 소위 근대화의 물결이 불어 닥쳤다. 1차 산업 중심의경제적 기반이 2차 산업, 즉 공업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이 박정희 정권시절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강하게 근대화와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곳이 현재의 구미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 구미산업공업단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첨단전자산업단지가 구미에 조성되면서 국가적으로 초미의 관심지역으로 부상되었다. 당시 크고 작은 개발사업이 곳곳에 펼쳐졌지만 구미산업공업단지가 규모면에서 으뜸이었으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하고 놀라운 변화상이었다.
넓은 지표면을 변화시키는 대규모 개발사업은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누대를 걸쳐 살아온 주민들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개발사업에 편입된 주민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주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비자발적 이주, 강제이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규모 개발사업은 수많은 비자발적 이주민을 발생시킨다.이주민이 발생할 경우, 재정착과 재적응에 필요한 적법한 절차에 따른 보상대책과 이주대책, 사후 보장책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근대화 초기에는 이러한 법적이고 행정‧재정적 제도가 체계화되지 않아 재정착에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구미산업공업단지에 편입되어 강제로 이주한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구미산업공단에 편입된 지역에 거주해 온 주민들은 낙동강변에 형성된 광활한 퇴적층 위에 일군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옥토에 사과나무를 심고, 벼농사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 300여년의 긴 세월동안 지연과 혈연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농경정착생활을 영위해 왔다.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인 적응장치가 공업단지 조성으로 해체될 위기를 맞은 것이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이주민 신세]
그들은 한때 공업단지 조성이 삶에 큰 행운이 될 것으로 기대한 적도 있었다. 1차로 발표된 공업단지 조성계획에서는 토지 일부는 편입되지만 마을은 편입되지 않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 당시 오히려 공업단지가 들어서면 땅값도 상승하고 가족들이 쉽게 취직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마침 건설 중이던 경부고속국도 인터체인지가 마을 인근에 개설된다는 소문 때문에 오히려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로 발표된 공업단지조성계획에서 마을까지 공단에 편입된다는 확대계획안이 발표되자 기대가 걱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주와 생계대책 등이 큰 걱정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의 적응양식의 해체와 새로운 적응방식의 개발이라는 강제적 변화를 몸으로 겪어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주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관계당국의 일방적 지시와 통보에 의해 모든 보상과 이주문제가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논이나 밭, 가옥 등 이른바 물건보상가의 책정은 관계당국이 결정하여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이주대책도 자유이주와 이주단지로의 집단이주를 놓고 선택하라는 방식이었다. 집단이주단지 선정도 주민들의 의사반영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과의 협의체가 만들어져서 협의과정을 거친다든지, 공청회 등을 통한 설명과 설득 작업도 없었다. 도청과 군청 관계자가 마을동장을 통해 시책을 전달한 뒤 주민들의 동정을 보고받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보상과 이주가 진행되었다.
집단이주단지를 선정할 때, 관계당국에서는 현 이주단지인 신평동 사기점으로 낙점하였으나 주민들은 구미시 송정동 현재의 KBS방송국 자리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심하게 반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상모동 생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급기야 집단행동을 감행하였다. 데모를 한 것이다. 이주민들은 이주단지의 재검토와 동시에 농사지을 땅을 대토해 달라는 것과 현실에 맞는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상모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경찰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주동자들이 경찰서로 연행되는 탄압을 받았다. 농사만 짓던 순진한 농민들의 항의데모도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경찰로부터의 연행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공포였다.
경찰서에서 석방된 다음에는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책정된 보상금을 앞다투어 수령하고 말았다. 주변 지가가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일찍 보상금을 수령하여 이주하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