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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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漢相 |
이칭/별칭 | 필경(弼卿),장병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내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56년 - 장한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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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장한상 무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장한상 선전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3년 - 장한상 희천 군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5년 - 장한상 자산 군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88년 - 장한상 태안 군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4년 - 장한상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94년 - 장한상 삼척 첨사에 임명 |
추모 시기/일시 | 1700년대 - 장한상 경덕사에 배향 |
활동 시기/일시 | 1711년 - 장한상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 - 장한상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 - 장한상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장한상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18년 - 장한상 영변 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22년 - 장한상 회령 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23년 - 장한상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23년 - 장한상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24년 - 장한상 사망 |
출생지 | 장한상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내산리 |
묘소|단소 | 장한상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 백학산 |
사당|배향지 | 장한상 사당 -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 경덕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대표 관직 | 황해도 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비안현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필경(弼卿). 아버지는 경기도 수군 절도사(京畿道 水軍節度使)를 역임한 장시규(張是奎),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 李氏), 할아버지는 장익(張翊), 증조할아버지는 장덕명(張德明)이다. 사위가 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역임한 이삼(李森)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장한상(張漢相)[1656~1724]은 1656년(효종 7) 경상도 비안현 청석(靑石)[현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내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무신인 부친 장시규의 영향 아래 어려서부터 무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무인적 기질과 훗날 무신으로서의 업적으로 인해 비안 지역에는 지금까지 장한상의 무용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1676년(숙종 2) 지방의 재주 있는 인사들을 무과 경시(京試)에 바로 응시케 하자고 병조(兵曹)에서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이 윤허되어 당시 비안현의 한량(閑良)이었던 장한상이 추천되었으며, 그리고 이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678년(숙종 4)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장한상은 내외 무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683년(숙종 9) 희천 군수(熙川 郡守), 1685년(숙종 11) 자산 군수(慈山 郡守), 1688년(숙종 14) 태안 군수(泰安 郡守) 등과 같은 지방관으로도 여러 차례 제수되었다. 이후 장한상은 무신으로서 요직에 있으며, 울릉도 수토 및 백두산 일대 국경 조사와 같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쟁으로 인한 정쟁이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반대파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1694년(숙종 20)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당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이정익(李禎翊)은 논계를 통해 간신에게 빌 붇고 탐오(貪汚)의 죄를 저질렀다며 파직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삼척 첨사(三陟 僉使)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울릉도 수토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당시는 안용복(安龍福) 사건 등 지금의 울릉도·독도 일대를 둘러싸고 일본과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당시 당국자 남구만(南九萬)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울릉도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사를 요구하였고, 그 임무가 삼척 첨사였던 장한상에게 부여되었다. 장한상은 1694년 9월에 출발하여, 울릉도 일대를 조사하였고 10월에 돌아왔다. 장한상의 보고에 따르면 울릉도에 일본인의 자취는 없었으며, 토품(土品)을 알기 위해 모맥(麰麥)을 심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울릉도 일대를 그린 그림을 바쳤다고 하는데, 그 그림이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것과 사뭇 달라 실제 장한상이 울릉도를 답사했는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장한상을 시작으로 한말까지 울릉도 수토는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1711년(숙종 37)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 兵馬節度使)[북병사(北兵使)]로 부임하였다. 장한상은 북병사로 있으면서도 간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1712년 국경을 넘어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벌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 일로 인해 파직 당했지만 곧 복직되었다.
한편, 북병사로 있던 1712년은 백두산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간에 국경 문제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정의 지경연(知經筵) 최석항(崔錫恒)은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 일대에 대한 조사를 건의하였고, 백두산 남쪽 조사를 북병사 장한상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장한상은 빙설(氷雪) 때문에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하였으며, 조사 결과가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때 사헌부는 정죄를 요청했으나 윤허되지는 않았다.
1716년(숙종 42)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 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흉년이 들자 강화도의 군량미를 열어 구휼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1718년(숙종 44) 영변 부사(寧邊 府使)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송사윤(宋思胤)은 상인과 결탁하고 뇌물을 받았으며, 관기(官妓)와 어울렸다는 이유로 장한상을 공격하며 파직을 요청했으나 또한 윤허되지 않았다.
1722년(경종 2) 회령 부사(會寧 府使)에 제수되었으며, 이해 경종으로부터 궁시(弓矢)를 하사받기도 했다. 1723년(경종 3)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북병사]에 제수되었는데,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이헌장(李獻章) 등은 지난번 북병사 재임 시절의 벌목 사건과 역적 이이명(李頤命)에게 아첨했다는 이유로 삭직을 요구하였다. 당시는 소론(少論)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로, 노론(老論)에 대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노론 대신이었던 이이명은 1722년 소론의 공격으로 사사(賜死)된 인물로, 그와의 친분을 이유로 장한상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같은 해 장한상은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 兵馬節度使)에 제수되나 이번에도 삼사(三司)의 공격을 받아 결국 낙마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724년(경종 4) 한성부에 위치한 사위 이삼(李森)의 집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한상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도록 담군(擔軍)을 보내주었다.
[묘소]
묘소는 백학산(白鶴山) 동쪽[현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장한상은 부친 장시규(張是奎)와 더불어 경덕사(景德祠)에 봉향되어 있다. 경덕사는 순천 장씨 가문들이 세거하고 있는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자리하고 있다. 경덕사는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12년 중수, 1985년 중건된 것이다. 한편 1988년에는 경덕사 옆에 유물관을 건립하여, 장시규·장한상 부자 관련 고문서와 각종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나 현재는 고문서 및 유물 일부(10여점)을 제외하고는 의성 조문국 박물관에 위탁보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