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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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千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천수(朴千壽)[1897~1947]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에 참가하였다.
3월 18일 밤 9시 사촌동 동민 600~700명이 횃불을 밝히며 만세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도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박천수는 김성갑(金聲甲)·김용준(金龍俊)·신주칠(申周七) 등 송내동 주민들과 함께 사촌동으로 갔다. 밤 9시 무렵, 그곳에는 서변동·동변동·윤암동·송내동 등 부근 주민 600~700명이 모여 도로를 오르내리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는 시위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점곡 주재소로 몰려가 주위를 돌며 밤새도록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다음날 20일 새벽 1시까지 벌어졌는데, 일본 경찰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3월 20일 만세 시위는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강제 해산되었으며, 시위 주도자들이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20일 밤 10시 다시 만세를 불렀다. 점곡면 독립 만세 운동에서 사람은 모두 21명이었다. 박천수는 1919년 5월 5일 대구 지방 법원 의성 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