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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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2월 19일 - 이종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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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17일 - 이종출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독립 만세 시위 주도|이종출 안평면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 주도 종료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3일 - 이종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1927년 - 이종출 비밀 결사 인도 회의소 가입, 활동|이종출 인도회의소(仁道會議所)에 가입하여 활동 종료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이종출 신간회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66년 6월 28일 - 이종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이종출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의성 -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
거주|이주지 | 의성 -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
활동지 | 의성 -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
성격 | 3·1 운동 |신간회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안평면 대사동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비밀결사 인도회의소 가입|신간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종출(李鍾出)[1890~1966]은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6일 오후 8시에는 다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시위 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이어 17일에도 오후 8시경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여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거쳐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5월 13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남여명(南汝明)·박승채(朴升采) 등이 조직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비밀 결사 인도 회의소(人道會議所)에 가입하여 손인식(孫仁植)·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종출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봉양면 사부동에 공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