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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382
한자 善山邑
영어음역 Seonsan-eup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행정구역
면적 66.91㎢[2015년 12월 31일 기준]
총인구(남,여) 14,574명[남 7,307명, 여 7,267명][2016년 6월 30일 기준]
가구수 5,981세대[2016년 6월 30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행정구역.

[명칭유래]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불린 이름으로, 고을에 도적이 없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곳이므로 선산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신라시대에 일선주·숭선군, 고려시대에 선주부, 조선시대에 일선현·선산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동내방(東內坊)·독동방(禿同坊)·무래방(舞來坊)·서내방(西內坊)을 통합하여 선산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선산읍으로 승격하였고, 1983년 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성면 포상리·봉곡리, 금릉군 감문면 소재리·봉남리를 편입하였다.

[자연환경]

백두대간 낙동정맥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 줄기가 연악산을 거쳐 동으로 달려 형성된 비봉산(飛鳳山)이 남쪽으로 금오산과 마주보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남쪽으로 감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앞들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황]

구미시 북단 중앙부에 있는 지역으로, 2015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66.91㎢이며, 2016년 6월 30일 현재 총 5,981세대에 14,574명[남 7,307명, 여 7,26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서북쪽으로 무을면옥성면, 서쪽으로 김천시 감문면, 남쪽으로는 고아읍, 동쪽으로 낙동강과 접한다. 18개 법정리(27개 행정리), 212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 영봉리(일명 장원방), 무래(舞來), 새작골, 탑골, 황새골, 오미기, 하송, 신당게, 골두메, 널뫼, 뒷듬, 대밭골, 월이골, 황세월, 솝실, 구시골, 개뚝, 새도방 등이 있다.

주요 지명으로 옛날 사직단이 있던 사방(社坊), 글 잘하는 선비가 많이 났다는 문동골[文同, 文山], 하마비(下馬碑), 읍성의 동문이 있던 동문(東門)걸, 남문(南門)통, 서문(西門)통,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강학처인 신포서당이 있는 신당포(新堂浦), 향교 유생이 많았다는 생골, 용이 승천했다는 용동골[龍東谷], 왕건 태조의 군사 대열이 뻗쳤다는 태조미(太祖尾),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후학을 가르치던 송당정사가 있는 송당 등이 있다.

이 밖에 선산읍 북동 지역으로 가는 통로인 금무고개, 선산읍 동쪽 통로인 흰터고개[白峴山], 왕건보(王建洑), 태조방천(太祖防川),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선산부사로 있으면서 감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었던 동지수(冬至藪), 오란산(五卵山) 주봉인 동지산(冬至山) 등이 있다.

구미 시내에서 국도 33호선을 따라 고아읍을 지나 선주교(감천다리)를 건너면 좌우로 선산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단계천 변에는 고려 말 선산군수를 지낸 이득진이 세웠다는 낙남루(洛南樓)가 복원되어 있다.

낙남루 앞을 지나 선산읍으로 들어오면 동쪽으로 동부리·교리·화조리가, 서쪽으로 완전리·노상리·이문리가 자리 잡고 있고, 시도 1호선이 원3리에서 독동리를 지나 일선교도개면 다곡리로 이어지고, 국도 33호선이 교리생곡리를 지나 도개면해평면 우회 도로로 연결된다.

서쪽으로 죽장리·봉곡리·포상리를 지나 무을면과 상주시로 이어지는 국가지원지방도 58호선이 통과하고, 선산남문 앞 좌회전 1㎞ 지점에 개설된 중부내륙고속국도 선산IC를 통하여 서울·대구·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로 연결된다. 서남쪽으로 내고리, 북산리, 습례리를 거쳐 김천시로 이어지는 국도 59호선이 지난다.

문화재로 국보 제130호인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천연기념물 제225호인 구미 독동리 반송,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인 선산객사, 유형문화재 제236호인 하위지 유허비,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인 금오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123호인 선산향교 등이 있다. 예부터 선산은 조선 유학의 연원 또는 연수(淵藪)로 일컬어져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고, 특히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재임할 때에 공부하기 위해 찾아온 선비들은 영남 사림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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