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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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英烈 |
영어음역 | Gim Youngryeol |
이칭/별칭 | 열지(烈之),맹암(孟庵),양효공(良孝公),의성군(義城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상일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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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몰년 | 1404년 |
본관 | 의성 |
대표관직 | 경기우도수군첨절제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열지(烈之), 호는 맹암(孟巖). 아버지는 상서(尙書) 김굉(金紘)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음성의 인물로 등재되어 있다.
[활동사항]
김영렬(金英烈)[?~1404]은 1394년(태조 3)에 전서(典書)로 있던 중 그해 경기우도수군첨절제사가 되었다. 그 때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1395년에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해 1397년 옹진(甕津)으로 유배되어 수군에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에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에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잡은 공으로 태종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해졌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우의정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