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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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皮學用 |
영어음역 | Pi Hakyong |
이칭/별칭 | 경직(景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선비|자선사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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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생년 | 1767년 |
몰년 | 1830년 |
본관 | 단양(丹陽)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이자 자선사업가.
[활동사항]
피학용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살았으며, 천석(千石)의 부자였다. 1805년(순조 5) 38세 때 충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돈 백 냥과 수십 석의 쌀로 구휼하였다. 충주목사가 이 사실을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박윤수(朴崙壽)에게 알렸으며, 이 사실로 표창을 받았다.
1819년(순조 19) 52세 때에는 순조의 세자 익종(翼宗)이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맞아 가례(嘉禮)를 올릴 때 함(函)을 졌다. 그 연유는 왕실에서는 조만영이 충주에 살았으므로 그 지방에서 다남(多男)하고 부(富)하고 팔자 좋은 사람 중에 함을 질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으므로 충주목사가 피학용을 천거하여서 함을 지게 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흉년에 개인 사재로 구휼하여 표창을 받았고, 왕실의 가례에 함을 진 까닭으로 어사화(御賜花)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