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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10
한자 金堉
영어음역 Gim Yuk
이칭/별칭 백후(伯厚),잠곡(潛谷),문정공(文貞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80년연표보기
몰년 1658년연표보기
본관 청풍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 음성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아버지는 김흥우(金興宇)이다.

[활동사항]

김육(金堉)은 9세 때 아버지 김흥우의 임지인 강동(江東)으로 따라가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러나 잇달아 상(喪)을 당하여 상제로 7~8년간을 지내며 곤궁하게 떠돌아다니다가 25세 때 장가들고,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曺植)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한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무고하자, 김육은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써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광해군이 노하여 폐고(廢錮)를 당하자 가평 잠곡으로 은둔하였다. 이때 「노고영강편(老孤嬴羌篇)」이란 시(詩)를 지어 간신들을 풍자하였다.

1624년(인조 2) 음성현감에 부임하여 「진폐소(陳弊疏)」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음성현은 매우 적어 2면(面)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이 황폐하여 기근이 쌓이고, 전염병이 돌면 해결 방법을 얻지 못하고, 백성은 허다한 요역과 부세(賦稅)의 변출(辨出)이 심하다고 하였다. 또 유망자(流亡者)가 많아 호구(戶口)를 불릴 수가 없으니 군현을 합병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땅이 넓은 충주목의 일부를 할속(割屬)할 것을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 참의로 감찰 이만영(李晩榮)과 함께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건의하였다. 1639년(인조 17) 동부승지·대사성·부제학을 거쳐 1643년(인조 21)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도승지가 되고,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귀국한 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1644년(인조 22)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로 역(曆)의 개정을 주장하였는데, 중국의 신역(新曆)은 우리나라 역서와는 틀린 것이 많을 것이니 사신이 갈 때 일관(日官) 을 동행시켜 배워오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1646년 사은사가 되어 관상감제조로서 역관 2명을 동행하여 역법을 배워 왔고, 1653년(효종 4)에 처음으로 시헌역법(時憲曆法)을 행하고, 이것을 근거로 1708년(숙종 34)에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하였다.

1654년 6월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학문과 사상]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활자(活字)를 새로 제작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경제 정책에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여,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하여 천문·지리·병략·점서·율역에도 정통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황명기략(皇明紀略)』, 『을묘록(乙卯錄)』, 『유원총보(類苑叢寶)』, 『송도지(松都誌)』, 『잠곡유고(潛谷遺稿)』, 『잠곡필원』,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辟瘟方)』, 『당적내외세보(黨籍內外世譜)』, 『팔현전(八賢傳)』, 『종덕신편(種德新編)』,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등이 있다. 편저로『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유화총보(類花叢寶)』, 『당삼대가시전집(唐三大家詩全集)』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가평의 잠곡서원(潛谷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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