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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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raditional Korean houses in Eumseong displaying the austere lifestyle of Confucian follower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기범 |
[개설]
음성의 전통가옥은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건축물들이고, 유교적 특징이 강조되어 있다. 옛사람들의 생활 가옥이었던 고택들, 유교 이념을 교육하였던 향교, 유교 이념을 연구·전승하였던 서원들, 선현 제향과 풍속 교화의 장소인 사우들, 자연을 즐기는 여유가 담긴 누정들은 모두 조선의 시대정신이었던 선비 정신과 그에 입각한 건축미가 담겨진 전통가옥들이다. 이처럼 음성 지역에 유독 조선의 선비 정신이 깃든 전통가옥이 많다는 것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 정신이 면면히 전승되면서 현대를 사는 음성군민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의 생활 공간, 고택]
고택(古宅)은 궁궐·사찰·항교·서원 등과 같은 공공 건축물이 아닌 일반 사람이 사는 주택을 말한다. 고택은 고가(古家)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소유자의 이름을 따거나 혹은 소재지를 중시하여 명칭하기도 하고 거주하거나 거주했던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칭하기도 한다.
음성군 지역에는 현재 음성 김주태(金周泰) 가옥, 음성 공산정 고가, 팔성리 고가, 반기석 고가 등 중요한 고택이 남아 있어 전통 주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그 문화적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으며,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전통 고택은 옛사람들의 생활공간이다. 상류 주택은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고 솟을문·바깥마당·중문·사랑마당, 사랑채·안마당·안채 등으로 구성된다. 풍수지리를 중시하여 대체로 남향(南向)을 이루고 있다. 전통 고택은 자연과의 조화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 고택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1. 음성 김주태 가옥
전통 한옥인 음성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이익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랑채는 종도리 장설 하단에 있는 상량문에 “대한광무오년신축이월초칠일진시상량(大韓光武五年辛丑二月初七日辰時上樑)”이라 기록되어 있어 1901년(고종 5)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부재의 크기나 규모, 가구(架構)의 구성 방식 등으로 미루어 사랑채와 같은 연대이거나 더 올라가는 19세기 중엽 정도로 추정된다. 한때 충주목사를 역임한 박규희(朴圭熙) 가문이 장기간 거주하여 박참판댁으로도 불렸다.
음성 김주태 가옥은 건축 연대는 올라가지 않으나 공간 구성이 아름다운 건물이다. 안채 뒷마당의 출입을 윗방이나 부엌을 통해서만 할 수 있도록 하여 여성 공간을 마련한 점, 사랑채를 가리는 시설 없이 높은 축대 위에 당당하게 세운 점 등이 특색이다. 음성 김주태 가옥은 1984년 1월 10일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23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2. 음성 공산정 고가
전통 한옥인 음성 공산정 고가는 안채 상량문에 “단군기원후사이오칠년갑자년 칠월(檀君紀元後四二五七年甲子年七月)”이라 기록되어 1924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건축 연대는 이보다 앞서는 19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안채가 중수될 당시에 건축되었고 기타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음성 공산정 고가의 특징은 부엌 위로 함각을 만들어 그곳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까치구멍으로 하고, 대문간을 사랑채 뒤의 측면으로 낸 것에 있다.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의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음성 공산정 고가는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585-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음성 공산정 고가’이었으나, 마을 뒷산이 ‘公’ 자처럼 되어있고 과거 정자와 정자나무가 있어 공산정이 마을로 불린 것을 반영하여 2007년 1월 29일에 지정 명칭을 ‘음성 공산정 고가’로 변경하였다.
3. 음성 팔성리 고가
팔성리 고가는 1930년대 지은 건물로 넓은 대지에 사랑채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이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구성은 ‘ㄱ’자 형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초각을 한 양봉을 쌓았으며 기둥 위로 대들보와 종보를 걸어 5량집으로 결구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2줄의 겹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의 온돌 마루를 놓았으며, 앞쪽으로도 바닥을 높인 툇마루 1칸을 설치하였다.
이 고가는 건립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1930년대 전통적인 주거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129-1번지[팔성길82번길 13]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4. 반기석 고가
반기석 고가는 1900년대 건립되었다고 하며 20여 년 전에 보수하였다. 행랑채가 있었으나 훼손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사랑채만이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구성은 평면 ‘一’자 형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을 사용하여 기단부를 두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가구의 구조는 1고주 5량으로 결구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방의 크기가 작고 부엌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큰 형태이다. 안방의 평면이 4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구들이 부엌이 아닌 바깥에 따로 연결되어 배치되고 있고, 방 옆에 측마루가 따로 배치되어 있는 점 등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반기석 고가는 1900년대의 지역적 건축 특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 49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유교 이념의 교육 공간, 향교]
향교는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설립·운영된 교육 기관으로, 국가가 유교 이념을 보급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연계시켜 지방에 세웠다. 향교 건축의 일반적 공간 구조는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서재(東·西齋), 교직사(校直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대성전과 명륜당이 핵심 공간이 된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교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 또는 온돌방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익공(翼工) 양식과 민도리집 양식으로 건축된다.
음성향교는 1560년(명종 15) 3월 10일에 음성현 석인동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47년(인조 25) 현재의 음성읍 읍내리 향교말 옥녀봉 밑으로 이건되었다. 명륜당은 1651년(효종 2), 1870년(고종 7), 1887년(고종 24)에 각각 증수하였다. 1976년 내삼문과 대성전이 보수되었고, 1978년 명륜당과 동·서재를 증수하고 교직사(校直舍)도 신축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향교말 156-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1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소박함과 간결함의 연구 공간, 서원]
서원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워진 사학 기관이다. 서원 건축의 공간 구성은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講堂), 원생(院生)·진사(進士) 등이 숙식하는 동·서재 등 3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답하는 누각 등이 있다.
서원 건축의 배치는 문묘 및 향교와 유사하여 앞쪽에 교육 시설을 마련하고 뒤쪽에 제향(祭享) 시설을 마련하였다. 각 건물은 일정한 중심축 선이 있어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앞에서부터 정문(旌門)·누각·강당·내삼문(內三門)·사당 순으로 배치하였다. 서원은 향촌에 은거하며 학업을 익히고자 하는 뜻으로 세웠기 때문에 건축 양식이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며 특별한 꾸밈이 없다. 또한 자연과 잘 어울리는 조형미가 돋보이며 건물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1. 운곡서원
운곡서원(雲谷書院)은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 정구(鄭逑)가 이미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朱子)를 모시고 백운서원(白雲書院)이라 하였으며, 1661년(현종 2)에 정구를 배향하고 운곡서원이라 하였다.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되었는데, 이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畵像讚)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따라 폐원되었다.
1892년(고종 29) 지방 유림의 발기로 설단향사(設壇享祀)하고 1894년(고종 31)에 서원을 재건하고 이듬해 구 영정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1963년 중수하고 1974년 단청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서원말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2. 지천서원
지천서원(知川書院)은 1740년(영조 10) 창건되었고 1800년(정조 24)에 중건하였으며,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원되었다가, 1893년에 축단(築壇)하여 1906년에 재건하고 1963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으며 음성군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선현 제향과 풍속 교화의 공간, 사우]
사우(祠宇)는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주기적으로 제향하는 장소이다. 사우는 조선 중기 이래 서원의 발흥과 더불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사우는 서원과 달리 처음부터 사현(祀賢)과 풍화(風化)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사우는 보본숭현(報本崇賢)에서 비롯되었고, 특히 그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한 보답과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 교화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서원·사우라는 명칭은 배향 인물의 위상에 따라 구별되었는데, 서원이 사우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우의 공간 구조는 핵심 공간으로서 배향하는 인물의 사당, 강당(講堂)인 재실(齋室), 삼문(三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대부분의 사우는 서원의 남설과 함께 조선 후기에 큰 폐단이 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많은 사우가 철폐되었다. 음성군의 대표적인 사우로는 태교사(泰喬祠)가 있다.
1744년(영조 20) 주응동(朱應東)이 안성에 거주하는 김문웅(金文雄)으로부터 주자의 영정을 기증 받아 주씨 문중에 문곡영당(文谷影堂)이라 칭하는 사당을 창건하고 서원을 개원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어 사당 명칭을 태교사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태교사는 원남면 조촌리에 있는데 철종(哲宗) 병진년에 회암 주부자를 위하여 건립(泰喬祠在遠南面助村里哲宗丙辰建晦庵朱夫子)”하였다고 하여 1856년(철종 7)에 건립된 듯하다. 1905년과 1940년에 중수하였으며, 1963년 계단을 신설하고 정문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을 즐기는 여유 공간, 누정]
누정(樓亭)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택해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기 위해 지어진 공간 건축이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집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누정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포괄하여 부르는 용어로서 정루(亭樓)·정각(亭閣)·정사(亭榭)라고도 부른다.
1. 백련서재
백련서재(白蓮書齋)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성부판윤을 지낸 서암 신후재(申厚載)[1636~1699]가 1694년 갑술옥사로 유배되고 1697년(숙종 23) 석방된 후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던 곳이다. 신후재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가지고 온 백련근(白蓮根)을 연못에 심은 데서 백련서재라 불렀고 한다. 신후재는 버드나무도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고 백련만 번식하고 있다.
백련서재의 전체 배치는 동향(東向)으로 3단 정지한 후 첫째 단에 연못을 설치하고 중앙에 둥근 모양의 섬을 하나 두고 있으며, 그 뒤로 정지된 둘째 단에는 정면 4칸·측면 1칸 반에 꺾이어서 정면 3칸·측면 1칸 반을 덧붙여서 ㄱ자 형을 이루고 있고, 민도리 계통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축조되어 있다.
2. 경호정
충청북도 음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안에 있는 경호정은 1934년 군수 권종원(權鍾源)이 연풍정이라 하여 창건하였고, 그 뒤 군수 민찬식(閔燦植)이 경호정(景湖亭)이라 개칭하고 제액(題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정자이다. 음성군 향토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호정은 동남향으로 평탄하게 정지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중심 부분에 둥근 모양의 섬을 두고 주위에 연못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정자나 누정 건축에서 흔히 이용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연못의 가운데에 있는 둥근 형태의 섬은 하늘[天]이 곧 양(陽)이며 원(圓)이고, 땅[地]이 곧 음(陰)이고 방(方)이라는 음양오행론에 따라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경호정에는 정자가 놓여 있는 섬으로 출입하도록 좌·우·중앙 부분에 폭 1.35m의 화강석 교각이 설치되어 있다. 정자는 섬의 중앙에서 뒤쪽으로 위치하고 그 전면에 음성읍 평곡리 평곡리 사지에서 옮겨다 세운 단아한 모습의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 1982년 12월 17일 지정)과 독립기념비가 있다.
전체적으로 주위의 버드나무 그늘과 연못, 정자와 교각 등이 잘 조화되어 여유와 사색,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경호정은 공설 운동장이 옆에 있어 읍민들에게 가장 가깝고 좋은 휴식처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항상 끊이지 않는다. 1977년 정자 전체를 단청(丹靑)하고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충효정
충효정(忠孝亭)은 3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전하는데, 처음에는 피금정(披襟亭)이라 하였다 한다. ‘피금(披襟)’이란 여름날 온 몸에 땀이 흘러 정자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으로 옷깃을 헤친다는 뜻이다. 1939년 하당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교실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정자를 헐어 교실 짓는 목재로 사용한 후에는 빈터만 남아 있었다. 1990년에 마을 사람들이 재건하고 충효정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효정은 마을 우측 앞쪽의 들판 한 가운데에 높게 조성된 조그마한 언덕 위에 동·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주위에 수려하게 둘러싸인 산·냇가 등과 조화를 이루며, 전망이 좋고 경관이 뛰어나고, 시원한 고목의 그늘이 있는 곳이다. 경관을 보며 휴식하고, 풍유와 창작을 즐기고, 또한 종회나 동회, 각종 회의 장소로 이용되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밖에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응봉의 난정(蘭亭),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면사무소 뒤편에 있던 풍락정(豐樂亭),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방죽안에 있었던 음애동(陰崖洞) 정자, 음성현 관아의 동쪽에 있던 의송정(倚松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