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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리 터줏대감들이 살아온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A020200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경수, 고유리

찬바람이 아직도 옷깃을 다시 만지게 하는 날씨이지만, 온돌방이라 그런지 추위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느낄 틈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갑산리의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권오성 할아버지의 시조인 안동권씨 문중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큰 관심거리였다.

[안동권씨가 갑산리로 오기까지]

동역 에서 만난 권오성 할아버지(77세)는 권씨 문중의 자손으로 현재 갑산리에서 살아가며 권씨 문중의 일을 맡아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안동권씨가 어떻게 갑산리로 들어와서 살게 되었는지에서부터 그 이유까지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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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리와 안동 권씨

갑산리양촌 문촌공의 자손이죠. 그 양반 시호가 권근 선생님의 후예예요. 그 어른이 아드님을 4형제를 낳았는데, 첫째아들 집은 충주에 있고 우리가 둘째아들 집이예요. 셋째아들 집은 권규라고 제감공인데 경안공주의 남편되는 분으로 여주에 살았습니다. 넷째는 안숙공이라고 권준인데, 사당이 방축리에 있습니다. 지재 할아버지는 문경공인데 사당은 갑산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임진왜란이 400년 넘었으니까 500년 정도 되었나 싶어요.”

우리는 놀라서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500년이요? 그럼 처음부터 계속이요?”

“애초에 살던 곳은 지금의 올림픽공원 자리입니다. 경기도 광주의 오포면에 살다가 양촌의 산소가 거기 있었는데, 문경공 지재 할아버지께서 온 것은 자손들이 갑산리로 오면서 불천지위 사당을 짓고 여기서 살고 있어요.”

갑산리가 처음부터 인구가 많고 안동권씨만 살았던 것일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우리의 궁금증은 1분도 채 가지 않았다.

“옛날에는 이 동네(갑산2리) 하고 저 동네(갑산1리)해서 100여 호가 살았어요. 안동권씨의 집성촌이었어요. 길가다 걸리는 게 권서방네일 정도로 굉장히 많이 살았습니다. 중년에 젊은 사람들이 다 나가고 지금은 몇 사람이 안 됩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안동권씨갑산리에 어떻게 와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주고 난 뒤, 다시 권씨 문중과 갑산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갑산리의 자랑, 권길 장군]

권길 장군과 그에 얽힌 「말무덤 이야기」 등 갑산리의 자랑 권길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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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리와 권길 장군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바로 실적을 조사해서 치사했어야 하는 데, 10년이나 지난 후에 알려진 것은 순변사, 목사였던 이일이나 김해가 도망을 갔기 때문에 그 치부가 들킬까봐 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가 나라가 평정되고 난 뒤 그분이 돌아가신 10년 후에야 나라에서 실적을 조사하였는데,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자 지방 사람들이 권길 판관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다 아니 옳은 일을 하다 죽었다고 하여 사의비라는 비를 해서 세웠어요. 그리고 나서 지방의 평민들과 선비들이 상소를 하여 돌아가신 권길의 아들이 신문고를 매일같이 두드리고 상소문을 올리니 나라에서 보고, 상주에 있는 일반 사람들한테 상소가 오지, 지방 선비들한테도 상소가 오지, 아들이 상소를 올리지. 상주에 진율을 보내서 조사를 해보니 사실이 맞았다 이거여. 그 때서야 치제를 지내고 그제야 벼슬을 내리고, 충신문을 내렸어요. 그것이 여태까지 내려오다가 권길에게 200정보 되는 제전(除田)을 내려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갑산리에 권씨 가문이 여태까지 내려왔던 것이지요. 권길이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받았으므로 정2품인데, 특이할 만한 것이 옛날에는 그 아드님에게 벼슬을 줄려고 불렀는데 벼슬을 하지 않았어요. 돌아가시면서 ‘내 자손도 내 뜻을 따르라’하고 돌아가셨지요. 쉽게 말하면 벼슬을 하지 말라고 한 거지. 그 이후로 영풍군 할아버지 이후에는 녹봉을 받는 벼슬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태까지 내려왔고 그래도 그런 분을 모셨다고 하여 우리는 자랑거리로 삼고 지금도 그 산소를 모신 곳을 능이라고 하지요. 종사 일을 맡으면서 그분의 사적지를 문화재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묘정비도 세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현재 갑산리에 남아있는 권씨 문중의 후손과 전국 각지의 문중 자손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인 권길 장군의 충절을 기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이야기였다.

[권길 장군의 뜻을 받드는 권씨 후예들]

현재 권씨 문중에서 특별히 하고 있는 문중 행사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가장 중요한 행사로 권길의 시향을 올리는 날에 대해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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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길 장군의 사후와 모임

“아, 있지요. 지금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 날이 권길의 시향을 올리는 날이지요. 나이 50~70세들 30~40명이 모여서 시향을 올리는데 후예를 기르기 위해 집집마다 젊은 사람들이 한 명씩 와서 시향을 올리는 데 참여하기로 했어요. 갑산리 안동권씨 모임은 협진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협력할 협에 나아갈 진자, 그 만들어진 계기가 참 웃지 못 할 일이지요. 5·16 나고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정권일 때 길 닦던 총각 녀석이 지나가는 아가씨를 희롱했는데,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고 그러느냐? 일가의 아주머니 벌이다.’라고 했지요. 그때는 만큼 권씨가 많이 살고 있어서 일가인줄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져서 젊은 사람들이 ‘일가도 몰라보니 어떻게 하느냐’하여 협진회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약관을 만들어서 조직했어요. 약관에 보면 미성년자들로 조직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미성년자가 다 나가고 그 때 결성되었던 협진회 사람들이 70이 넘은 지금에도 회원으로 계속 남아있지요. 그 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협진회에도 재산이 있는데, 몇 천만원이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종손이 돌아가셨는데, 소이면에 나가면 종손을 다 알았어요. 여기 산림이 많았는데 다 개인 살림이죠. 종산인 200정보 되는 땅이 매우 넓었기 때문에 그 산에서 나무를 하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못 구할 정도였어요. 그분이 산지기에게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면 못 들어 올 정도였지요. 그러나 가만히 사람들을 놔두었어요. 그렇게 세도 아닌 세도를 부렸지요.”

할아버지는 권씨 문중이 갑산리에서 터전을 이루고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 준 뒤, 문중 이야기를 들었으니 개개인의 뿌리를 생각해 보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권오성 할아버지 댁을 빠져 나오면서 동역 뒤 너치살 고개를 쳐다보았다. 바로 말무덤이 있는 곳인데, 아직도 그 때의 치열한 전투 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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