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A03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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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윤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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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무덤 이야기
권오성 할아버지는 음성군 소이면 갑산2리 동역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혼자 독학을 하여 학력을 만들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군대를 다녀 온 후 줄곧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바쁘게 지내다가 정년퇴임 후 고향에서 노인 회장, 권씨 문중 일 등을 맡아보며 바쁜 나날들을 보낸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예절 교육을 하고 있으며, 서예를 취미로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권씨 문중 일을 맡아보고 있는데, 권길과 관련된 말무덤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이야기를 조리 있게 잘 하시며, 사투리도 거의 쓰지 않는다.
갑산2리 동역마을에 살고 있는 권오성 할아버지께 권씨 문중 이야기도 들을 겸 찾아갔다. 할아버지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혹시 옛날이야기 같은 거 알고계시는 건 없나요?”하고 여쭤보았더니, “저기 저기 말무덤 있잖아요. 그 얘기 내가 해 줄게.”라고 말하며 매우 자세히 말무덤과 관련된 전설을 이야기 해 주었다.
권길 이 어른이, 1592년 상주판관 시절에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이분이 전망을 하셨어. 상주를 지키는데, 상주목사가 김해라는 분이 목사였는데 왜군이 쳐들어오니까 동네부터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어. 나가서 좀 싸우다가 다시 성에 와서 지키고 있는데 파죽지세로 몰려오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나중에 싸워 보지도 않고서 목사가 도망을 가버렸어. 목사를 따르던 병사들도 다 도망을 갔다. 당시 순변사였던 이일이 중앙군을 이끌고 상주를 와보니까 목사는 없고 권길이 혼자 지키고 있으니 형편이 없어서 “병졸들이 어떻게 싸우겠느냐!” 하며 칼을 들고 위협을 하였데.
하지만 권길이 지키겠다고 밤에 근각을 불었어. 지금 말하면 근각이 ‘부우’하고 소리 나는 그건가봐. 700명 정도의 병사를 모아 군을 지키고 있는데 춘변사 이일이 개울가에서 군사를 단련하고 있는데 연락병이 와서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려 준거여. 그러니까 이일이 어떻게 할 줄 모르다가 슬쩍 없어지고 권길 혼자 싸우는데 병사들에게 말하길,
“나는 나라의 녹봉을 먹고 사는 사람인데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겠다. 여러분도 나를 따르라.”
라고 말하고 상주골을 지켰던 거지.
그렇게 지키면서 이미 죽을 각오를 한 것이 자신의 옷에다 혈서로 유서를 썼어. 그 유서를 말안장에 매 달았던 거지. 계속 싸우는데,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적에 대항할 여력이 없어서 왜장에게 붙잡히면서 애마를 쫓아 보낸거여.
싸우다가 권길이 할 수 없이 잡혀서 왜적이 목을 치려고 하니,
“나의 상전이 나라를 져버리지 않았는데, 나도 나라를 져버릴 수 없다.”고 하자 먼저 박걸의 목을 치고, 권길의 목을 쳤어. 그때만 해도 왜적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목을 쳐서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코를 베어갔어. 지금도 일본에 가면 ‘비청’이 있죠? 그게 그 증거지. 따르던 관리들이 많이 죽고 전장에서 처참하게 죽었어. 시신을 거둘 세도 없이 전쟁은 끝이 나가고 있었던 거지.
한편 권길이 살던 집에 말이 도달했는데, 아무도 손도 못 대게 하고 발버둥을 치는데, 하인들의 말을 듣고 당시 권길의 부인이 밖으로 나가서 말을 어루만지자 말이 가만히 있더란 말이지, 말이 총도 맞고 했지만 400리가 넘는 거리의 상주에서 갑산리까지 찾아왔다는 것이 정말 대단했지.
“오필사차/사난휴시/이차규자”
“나는 반드시 여기서 죽어 시체를 거두기 어려워, 이걸로 장사를 지내라 그 뜻이지. 자세히 풀이하면 나는 국가를 위해서 여기서 죽어 내 시신을 못 거둘 거 같으니 이거를 나를 대신해서 장사를 지내라. 는 뜻이란 말이여.”
그러고 나서 말이 먹질 않으니 암만 먹을 것을 주어도 말은 먹지를 않더란 말이지.
식구들은 억울해서 유서와 옷가지를 가지고 장례를 지내기에 이르러 의관장으로 장례를 치렀지.
말무덤이 있는데, 현재의 위치가 산 위인데, 상주로 다시 돌아가다가 말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아닌가 싶어.
내가 어려서는 말무덤 벌초하러 가신다고 하시면서 말무덤을 몇 해에 한 번씩 벌초를 하셨어. 내가 종회장이 되고나서 말무덤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여름 같은 경우는 덤푸살이도 많고 해서 못가. 그래서 충신문 있는 데로 옮기려고 했는데, 성균관에 물어보니 “역사성 있는 것은 아무리 자손들이 불편해도 그 자리에 놔두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 자리에 충마총이라 이름하여 말무덤을 정리했어. 내가.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바로 실적을 조사해서 치사했어야 하는 데, 10년이나 지난 후에 알려진 것은 순변사, 목사였던 이일이나 김해가 도망을 갔기 때문에 그 치부가 들킬까봐 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가 나라가 평정되고 난 뒤 그분이 돌아가신 10년 후에야 나라에서 실적을 조사하였는데,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자 지방 사람들이 권길 판관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다 아니 옳은 일을 하다 죽었다고 하여 ‘사의비’라는 비를 해서 세웠다. 그리고 나서 지방의 평민들과 선비들이 상소를 하여 돌아가신 권길의 아들이 신문고를 매일같이 두드리고 상소문을 올리니 나라에서 보고 상주에서도 일반 사람들이 상소가 오지 지방 선비들한테고 상소를 올리지. 아드님이 상소를 올리지.
상주에 진율을 보내서 조사를 해보니 사실이 맞단 말이지. 그 때서야 치제를 지내고 그제서야 벼슬을 내리고 충신문을 내렸어. 그것이 여태까지 내려오다가 권길에게 200 정보 되는 제전을 내려주었어. 그렇게 해서 갑산리에 권씨 가문이 여태까지 내려왔던 것이여. 권길이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받았으므로 정2품인데, 특이할 만한 것이 옛날에는 그 아드님에게 벼슬을 줄려고 불렀는데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거야. 돌아가시면서 내 자손도 내 뜻을 따라라 하고 돌아가셨데. 쉽게 말하면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그건 그 양반 잘못인거 같어. 허허허.”
그 이후로 영풍군 할아버지 이후에는 녹봉을 받는 벼슬이 없었어. 그래서 여태까지 내려왔고 그래도 그런 저리를 모셨다고 하여 우리는 자랑거리로 삼고 지금도 그 산소를 모신 곳을 능이라고 하고 있어요. 종사 일을 맡으면서 그분의 사적지를 문화재로 인정을 받게 됐고 묘정비도 세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죠 지금은.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 날이 권길의 시향을 올리는 날이야. 나이 50~70세들 30~40명이 모여서 시향을 올리는데 후예를 기르기 위해 집집마다 젊은 사람들이 한 명씩 와서 시향을 올리는데 참여하기로 규칙을 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