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B010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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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윤정아 |
웃오갑마을 은 마을회관 왼편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며 개울 양 옆으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마을을 살펴보면 작은 복숭아밭 뒤편으로 옥산사가 닿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옥산사는 복숭아밭을 옆에 끼고 골목길을 따라 5분 정도 들어가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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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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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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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7
옥산사는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문을 지나면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왼쪽에는 문화재 알림판이 있고 왼쪽에는 중수비가 서 있다. 그 사이에 나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직재 선생님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의 문을 열고 안을 보니 영정을 올려두는 곳이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정면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사당과 달리 세 개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것에 의아해 하며 옥산사 문화재 알림판을 보았다. 옥산사는 음성군 향토문화재 유적 제16호이며, 감곡면 문촌리 오갑마을에 위치하여 주자, 송시열, 직재 이기홍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하는 사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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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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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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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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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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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섭할아버지 주자 영정사진
옥산사는 본래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이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자 40여 년 뒤인 1908년에 사액서원이 철폐됨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직재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복원을 결심하여 후손의 세거지인 오갑에 1908년에 재건한 사당으로 1927년에 중수하였으며 1983년 전주이씨 봉산군파 종친회에서 중건하였다.
옥산사의 전체 배치는 큰 경사를 이룬 대지에 지세를 따라 남향으로 3단 정지한 후 그 첫째 단에 홍살문을 두어 외부와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연못이 있고 돌계단을 오르면 정지된 둘째 단에 정면3칸 후면1칸의 맛배기와 지붕으로 삼문이 배치되고 있다. 이 삼문을 지나면 셋째 단에 2단의 대리석 기단상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된 사당이 있다. 배향되고 있는 이기홍[1641~1708]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로서 송시열의 문인인데 스승 우암이 제주로 유배되자 동문 40여 명과 함께 이를 변론하다 회령에 유배되어 5년 동안 그곳에서 후진을 교육했다. 그 후 청풍부사를 지내고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풍에 내려와 권상하와 함께 경사를 강론하고 사문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소일했다. 집의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술로는 『직재집』, 『일성편』, 『위학적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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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선생님영정
마을 분들에게 물으니 옥산사는 전주이씨네가 잘 안다며 이범규 할아버지(61세)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범규 할아버지는 마을회관 뒤편에 집이 있다며 현관이 큰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옥산사는 이범규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이문섭 할아버지(83세)가 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몸이 편찮으셔서 만날 수 없었다. 대신에 옥산사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영정을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건넌방에 들어가 길쭉한 통을 몇 개 가지고 나왔다. 통 안에는 오래되어 빛이 바래려고 하는 영정이 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직재 선생의 영정을 보여 주며 다른 것과 달리 천에 그린 것이라고 만져 보라고 하였다. 천에 그려서 그런지 돌돌 말려있는 부분의 상태는 양호하였다. 놀라는 우리의 모습에 흥이 났는지 할아버지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과 주자의 영정을 꺼내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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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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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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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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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섭 할아버지 송시열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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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규할아버지 토마토 농장1
“그리고 이런 거 봤어? 이게 주자의 영정사진인데. 이마 있는데 북두칠성이 있지? 그게 있어야 주자래.”
이범규 할아버지는 직재 이기홍 선생의 영정,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 주자의 영정 세 개를 보여 주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옥산사의 내용이 적혀있는 현판을 가지고 나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현판은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좀이 두세 군데에 쓸어 있었다. 현판에 구멍이 나 있지만 글씨를 못 알아 볼 정도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벌레가 자꾸 망가뜨려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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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섭할아버지 교지1
옥산사는 다른 사당과 다르게 위패를 두는 곳이 세 곳이었다. 사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정면에는 주자 선생을 모시고, 오른 쪽에는 우암 선생, 왼쪽에는 직재 선생을 두고 제를 올리기 때문에 위패가 세 개라고 한다. 그리고 제를 올리는 것 또한 봄과 가을에 일 년에 두 번 지내며 제사일은 음력 3월 15일과 음력 9월 15일이라고 한다. 제사를 주관하고 진행하는 것도 가족과 친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전주이씨가 주관하며 멀리 일본에 있는 유림들까지 와서 참여한다고 한다.
“제사는 우리 전주이씨네서 지내는 거고. 우리 아버지가 관리를 하시는 거야. 그리고 이거는 전국에서 유림들이 와서 지내는 거라 백 명도 넘지.”
우리는 옥산사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음력 3월 15일 제사에 촬영을 해도 될지 여쭈었다. 할아버지는 문중과 상의할 내용이라 지금 대답을 해주기 어려우니 나중에 연락을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영정사진과 옥산사 제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다시 찾아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집을 나왔다.
얼마 후에(2007.2.19.) 이문섭 할아버지(83세)댁을 다시 찾아가니, 할아버지는 퇴원을 하고 집에 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편치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다는 우리들을 위해 옥산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와 이야기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먼저 할아버지께서 꺼내 놓으신 여러 가지 고문서들에 대해 이모저모를 여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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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이게 직재 선생님의 교지면 밑에 있는 것은 직재 선생님의 부인의 교지, 안락 박씨여. 안락 박씨.”
“숙인 박씨와는 다른가요?”
“숙인 박씨는 정부에서 임금님이 하사해서 숙인을 넣었다는 숙인이지. 정부인.”
“왕비 아래 있는 계급인가요?”
“계급이 아니고, 왕비는 왕비대로 있고, 숙인 박씨라는 것은 직재 선생 정부인이란 말여. 왕재 19년 6월 30일, 여기도. 한 날에 임금님이 이거 써서 내린 거지.”
“옥산사는 뭐예요?”
“여기는 이 양반에 대해서 묘지를 세운 것이란 말이야. 내 작품으로다가 석문을 입적을 해서 산소에다가 세운거야. 신도비가 여기 있고, 장군총이 있고, 작명등, 망등.”
“직재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신 거예요?”
“이 양반이 임금께서 벼슬을 그렇게 많이 줬어도 벼슬을 싫다고 안 했어. 숙종 때 우암 선생님이 사약 받고 돌아 가셨을 무렵에, 제자를 40여명 거느리고, 우암을 죽이면 안 된다고 상극 들어갔는데, 숙종이 역정으로 몰아서 함경도 회령으로 귀향을 보냈더라고.... 그랬다가 5년 6개월만에 나왔어.”
“그리고 임금님이 좌의정, 영의정시켜줄테니 하라고 했는데, 극거이 벼슬은 싫다고 거절을 했다는 것이야.”
할아버지께 고문서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듣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옥산사에 관해서 궁금한 것을 여쭤 보았다. 옥산사는 세워진 지가 거의 150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풍파를 겪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재의 관리자 이문섭 할아버지(83세)가 책임을 맡아서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옥산사가 생겨나서 제를 올리는 과정 등에 대해 이문섭 할아버지께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직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3년 만에 장암 선생하고 안동권씨 권수암 선생님하고 추대해서 ‘이런 양반은 서원에 설립해서 추대하야 한다.’고 해서 설립이 되서 근 150년 제사를 지냈어.”
“그렇게 지내다가 왜놈들 침략에 대원군 때 회초를 당했다고, 대원군 때. 대한민국은 서원 때문에 망한다고, 서원은 다 회초를 내렸는데, 그 후에 시대가 지나가고 왜정난리가 났단 말이야. 일본놈들이 들어와서 설쳐대고 정치하는 바람에 40~50년 간 골자를 했어.”
“우리 할아버지가 다시 복원을 해야겠다고, 근재에 선생님하고 유림의 윗분들하고 상의를 해서 춘추에 제사를 올렸다고, 그러다가 일본놈 난리가 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40년간 없다가 8·15해방이 되고, 왜정 때 할아버지가 설립을 했다고, 약 100년 밖에 안됐는데, 유림에서 행사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오늘까지 있다가, 우리 아버지가 하다가 돌아가시고, 내가 이어 받아서, 30년간 내가 여태까지 추진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결국은 종손에서 합의해서, 여기 옥산사가 이루어 진거라고.”
옥산사로 들어가는 계단 아래 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사당에 연못이 있는 것이 특이하여 연못에 관해 여쭤 보았다. 연못은 예전에 있던 것을 좀더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연못이 있었는데 복원을 하면서 연못을 만든 것이야. 연못이라는 것이 그런 서원에는 자세한 건 모르는데, 옛날에 있던 것을 복원해서 만든 것이지. 거기서 고기를 기르거나. 서울 같은데 가 봐도, 숙종대왕 같은데, 경복궁 가 봐도 연못이 있으니까 그런 뜻을 담아서 있는 것 같더라고.”
“대지 혈이 붕어 같이 생겼다고 해서 앞에 연못을 두면 좋겠다고 해서 연못을 만든 것이라고, 붕어가 물을 먹어야 사니까 웅뎅이를 판 것이라는 거야.”
옥산사에 있는 연못, 건물들 하나하나에 담겨져 있는 뜻을 상세히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게서 오랫동안 지켜온 유림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옥산사에 가 보았을 때 오른쪽 편에서 본 커다란 재실은 전주이씨 문중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손님들이 찾아 올 때 불편함이 없도록 일부러 지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재실을 지은 연유에 대해서 할아버지께 자세히 여쭤 보았다.
그리고 특이하게 옥산사에는 재실이 있어서 재실이 왜 있는지에 대해 여쭤 보니, 옥산사에 1년에 두 번 제향을 지낼 때 사람들이 매우 많이 찾아오는데,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많아 손님들이 기거하며 자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차가 있나, 종중의 재정이 있나. 제사 한번 하려면, 재정관계, 교통관계, 숙소관계가 없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사촌이랑 상의해서 사후에 내가 재실을 지었다고.”
“내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관리를 했는데 재단적인 것을 가져다가, 재산 운영을 서울에서 해요, 지방에서는 내밖에 없으니까 내 사촌하고 둘이 상의해서 운영을 해나가는데, 기반이 서 있어서 탄탄하게 잘 돼나가.”
할아버지는 현재 옥산사 관리 방법과 여태까지 옥산사의 제향이 내려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 가지 자료를 보여 주며 이야기를 마쳤다.
[유림들이 모여 옥산사 제향을 지내다]
옥산사 는 일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제를 올린다. 제는 봄과 가을에 올리면 정확한 날짜는 음력 3월 15일과 음력 9월 15일이다. 2007년 5월 1일은 옥산사의 봄 제사가 있는 음력 3월 15일로 옥산사의 풍경을 담기 위하여 마을을 또 찾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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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 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