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C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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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윤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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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입상
비산리의 대표라고 하면 미타사를 빠뜨릴 수 없다.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입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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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마애여래입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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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마애여래입상2
현재 주지스님이신 희원 스님(57세)은 흔쾌히 미타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타사는 신라 시대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중엽 불이 나 폐사가 되었는데, 당시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복원하지 못하고 300년 간 빈터로 내려왔다. 300년간을 빈터로 내려오다 보니 사찰의 유물과 재산이 다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미타사의 터가 내려오던 중, 자유당 시절 말기 때 충주의 재산가이며 국회의원이었던 홍병각 씨가 주인이 없던 미타사의 땅 28정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눈 밝은 사람들이 땅을 차지했을 때야. 일정 때.”
스님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이름 없는 땅이었던 미타사 땅을 홍병각 씨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절터가 내려오던 중 어느 때인가 병자년, 수해가 나서 그나마 있던 유물들과 미타사의 절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경주최씨네가 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마을의 30리 안의 땅이 모두 경주최씨네 땅이라고 할 만큼 부자였던 경주최씨네 집은 자손이 없는 것이 아쉬움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천렵(소풍)을 나왔던 최씨는 선몽을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최씨네가 돌부처를 발견하면서 미타사의 역사가 새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몽을 받았데, 최씨라는 분이. 최 부자라고도 해. 그때 당시에. 최 부자라고 하는 분이 선몽을 받았는데, ‘내가 땅속에 묻혀 있으니 나를 좀 발굴을 해 달라. 날 좀 꺼내 달라.’라는 선몽을 받았다고 해.”
그래서 경주최씨네는 사람을 사서 땅을 파 보니 그 속에 부처님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최씨는 부처를 모시는 법을 몰랐지 뭐. 그래서 김치광 마냥... 나무와 짚으로 김칫독을 덮듯이 모시기 시작했지.”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 질로 태기가 있어 가지고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온다거나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오며는 밥을 싸가지고 와서 항상 부처님 옆에 올려놓고 절을 하고 밥을 먹고 하면서 부처님을 모셨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았다는 거지.”
이렇게 최씨가 부처를 발견해서 불공을 드리고 아기를 낳은 후에 마을 사람들은 이 부처를 정성을 다해 모시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 후 경주최씨네 가문이 한 대 거치고 그 다음 대가 됐는데, 한일합방 이후에 그 후손들 즉, 부처한테 빌어서 난 아들의 후손이 욕심이 나서 아버지 몰래 땅을 팔고 서울로 올라가서 살기 시작했다. 그 후손은 서울에서 자식을 일본 유학도 보내고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귀향하게 된다.
부처에게 빌어난 후손의 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음성으로 귀향해서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최씨 일가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스님은 최씨 후손의 손자 최봉락에 대해 말씀하였다.
“최봉락 씨는 두 남매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다가 다 못 마치고 돌아온 거지. 음성에서는 유식하다고 해서 약방을 하고 살았어.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예전부터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잖아. ‘아들을 낳게 해 달라.’면 아들을 낳고, ‘병을 낫게 해 달라.’면 병이 낫고 부처님이 너무 영험하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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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던 최봉락
최봉락에게는 부산 상대를 졸업하고 잉크 공장에서 일을 하던 나름대로 성공한 큰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큰아들이 좋지 않은 일로 죽게 되었다. 최봉락의 큰아들은 우연인지 필연이지 이전에 최봉락의 아버지가 실신한 날이었던 사월초파일에 죽었던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고 성공한 아들이 죽자 이를 괴이하게 여기어 무당을 찾아가게 되었다. 무당은 ‘당신네 조상 대대로 부처님을 잘 모시던 뒷산이 있었는데, 그 부처님을 배신하고 돌보지 않아서 벌을 받은 것이요.’라고 말해주었다.
이에 최봉락은 먹고 살기 바빠서 부처에게 무심했던 것을 깨닫고 뒷산의 부처를 찾았다.
“부처님이 그 자리에 있었나요? 그렇게 무심했었다면 없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있었지, 있었는데...뒷산에 와서 모니까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해두기는 했는데 온전했겠어? 비바람을 다 맞고 계셔서. 그 사람이 주변에 장동을 가져다가 토굴을 만들어 드렸어. 우리 사진 자료에도 남아 있어 비바람을 막아 드렸어. 자주 찾아뵙고 기도도 하고. 그러고 살았어. 부처님 영험이 있다고 지나가는 스님들도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모시게 해달라고 하자, 주인 아닌 주인이 되어 버린 거야.”
그 후로 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그 부처를 모시게 해 달라고 최봉락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봉락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최봉락 씨가 학식이 있는 분이야. 땡땡이 스님 같은 사람한테는 안 주고 있었어.”
그렇게 최봉락이라는 사람이 부처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