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D01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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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기범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이진말은 지리적으로 충청북도 북서부 지역에 있는 음성군의 중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생극면 생리, 북서쪽으로는 응천, 남쪽으로는 생극면 도신리, 북쪽으로는 생극면 신양리와 접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중부고속도로를 따라오다 일죽 나들목으로 나오면 동쪽으로 10㎞ 지점의 생극면 소재지에 이르게 되며, 면소재지에서 금왕 방면으로 1㎞에 이진말마을이 있다. 또한 4차선으로 확포장된 37번 국도를 따라 경기도 이천, 장호원을 지나면 생극면에 이르게 된다. 생극에서 음성군 소재지인 음성읍 방향으로 오다 보면 남쪽 방향 약 1㎞ 지점에 이진말이 있다. 청주 쪽에서는 36번 국도를 따라 증평을 지나 음성군 소재지인 음성읍에 이르게 된다. 음성읍에 이르러 37번 국도를 이용하여 서울 방면으로 가다 보면 금왕읍을 지나게 되고, 금왕읍에서 6㎞ 지점 생극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생극면 소재지인 신양리에 이르기 직전 국도 오른쪽에 산 밑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이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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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리 마을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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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표지석
이진말은 마을 동남쪽의 이진봉이라 부르는 산 밑에 있는 마을로 새로 형성된 문화마을과 같이 있으며,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속한 마을이다. 병암리는 병암1리, 병암2리, 병암3리, 병암4리까지 있으며, 이진말, 만담, 석병무, 안곤재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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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봉
마을 이름을 이진말이라 부르게 된 것에 대하여 이진말 이순복 할아버지(31년생, 77세)와 오덕욱 할아버지(35년생, 73세)는 “이 마을 뒷산에 임진왜란 때 적군인 왜군이 진을 치고, 팔성리 팔승산에는 아군들이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하는데, 왜군이 진을 쳤다고 하여 오랑캐 이(夷)자와 진을 쳤다 하여 진(陣)자를 합쳐서 이진말이라 불렀다고 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또한 “이진말마을이 옛날 진을 쳐서 그래서인지 6·25 때도 인민군이 많았어. 장호원, 무극에서 전투를 하고 습격과 후퇴를 하는데 이때 이 마을이 무극(금왕)으로 가는 길목이라 인민군이 많았지. 그리고 마을 앞 논바닥에서 앞개울 뚝방까지 방공호 식으로 땅을 파 놓았지”라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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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복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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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욱 할아버지
이진말마을 동남쪽에 자리한 이진봉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골짜기가 많은 편으로 산지당골, 안성골, 풋나무골, 병골, 참샘골, 도끼골 등이 있다. 마을 앞에는 얼기산과 장자봉산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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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기산
또한 이진말마을 앞으로는 응천이라 부르는 큰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 오른쪽으로는 오생리와 생리에서 흘러온 하천이 흐르는데 이 두 하천은 이진말마을 앞에서 합쳐져서 청미천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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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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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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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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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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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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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천3
응천에는 친환경 하천 공간 조성사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하천이 가진 본래의 자연성과 기능성을 최대한 살려 살아 숨 쉬는 맑은 하천을 만들고 있다. 지금도 이진말마을 앞 응천에는 우렁이(올갱이)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순복 할아버지와 오덕욱 할아버지는 “응천 앞 개울에는 얼마 전까지는 고기도 많고 베톨올갱이(다슬기)가 많았어. 그런데 지금은 우렁이가 많이 생겼어. 풀섶에 가면 잠깐이면 꽤 많이 잡어”라고 이야기하였다.
응천은 청미천과 연결되어 흐르고 있는데 청미천은 음성군 감곡면으로 흘러 경기도 장호원, 여주를 지나 남한강과 연결되고 있다. 그 옛날 남한강을 통하여 여주 등지로 다녔던 배가 청미천을 지나 응천까지 물길을 따라 올라 다녔다고 한다.
이진말마을은 오늘날 교통이 좋은 편이다. 3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어 지나가고, 또한 37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어 2007년 개통되어 마을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오늘날 이진말은 교통이 편하지만 옛날에도 부산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마을로, 마을 앞으로 삼거리가 형성되어 있어서 교통이 편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영남대로였던 흔적인 잔도가 남아 있는데 구주막거리와 깃대배기로부터 이진봉 산 밑에 옛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부터 교통의 요지 또는 도로의 결절지에는 주막촌이 형성되곤 하였는데, 이진말마을에도 주막이 형성되어 있어서 주막거리라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집들이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주막거리가 없어진 것에 대해 오덕욱 할아버지는 “언젠가 장마가 크게 나서 홍수에 휩쓸려 집들이 무너지면서 없어졌지. 그리고 주막거리에는 큰 물방앗간이 있었으며 한 1950년대까지 있었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진말마을의 북쪽 부분 지역에는 문화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예전에 깃대배기라 하였는데 진을 치고 싸울 때 깃대를 꽂아 놓은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에 문화마을이 형성됨으로써, 병암1리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진말마을과 새롭게 단장한 문화마을이 한마을을 이루고 있어 전통과 현대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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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막거리
이진말마을 뒤편에는 떡갈참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수령은 약 500여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병암1리 마을 주민들 모두가 산신을 믿고 산신제를 올리고 있어서 이 떡갈참나무가 민간신앙의 대상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오래전에 몇몇의 주민들은 이 나무를 위하며 개인적인 소원을 빌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 모두 이 떡갈참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신비로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6·25 사변이 일어난 1950년에 떡갈참나무의 가지에 잎이 나지 않아서 마을 주민들 모두 떡갈참나무가 죽은 줄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6·25 사변이 끝난 1953년 죽은 줄만 알았던 떡갈참나무에서 잎이 새로 나왔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떡갈참나무를 더욱 중히 여기며 마을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조사자들이 처음 사전조사를 나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산신제 다음으로 자랑스럽게 들은 것이 바로 이 떡갈참나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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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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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참나무
이 신기한 떡갈참나무의 생생한 증언은 김지만 할아버지(27년생, 81세), 오덕욱 할아버지, 이순복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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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참나무(인터뷰)
(김지만) “떡갈참나무가 그렇게 오래 묵은 것은 대한민국에 없을 거야”
(오덕욱) “전설로 얘기 들어보면 한 500년 넘었지 않나 그렇게 보는 거예요.
(김지만) “이 떡갈나무는
6·25 때 잎사구가 나오지 않아 죽은 줄 알았지. 6·25가 끝난 후 다시 잎이 나왔어.
(이순복) “예전에는 산제사와는 다르게 동네에서 개개인이 위하였어. 떡도 해다 놓고. 그네도 달기도 했어.”
(김지만) “그 굵기가 세 명이 안아도 부족할 정도로 굵어. 예전에 그 나무를 베려 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도 전해오고 있어.”
또한 이진말에는 서낭당이 구주막거리에 한 곳이 있었고, 바로 마을 건너 중말에 한 곳이 있었으며, 깃대배기에 한 곳 등 세 곳이 있었다. 예전에는 세 곳의 서낭당에서 돌아가면서 서낭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진말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중간쯤에 마을회관이 있으며, 마을회관 북쪽으로 10여m 지점에 마을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 서쪽으로 길과 접하여 소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임란공신 장충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 이진말마을은 99세대에 253명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로 1960~70년대 후반까지는 더 많은 세대가 살았지만 그 후 계속 줄어들다 2000년대 이후 문화마을이 들어오면서 줄곧 세대수가 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