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D0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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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영숙, 조수정 |
한복실 할머니는 병암1리 부녀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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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실 부녀회장님
처음 병암1리를 찾아 갔을 때 조사자들이 시집살이에 대해 여쭈자, 시집살이를 아주 심하게 겪었다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한복실 할머니를 지목하였다. 한복실 할머니는 현재 병암1리 부녀회장을 맡고 있고, 병암1리 부녀회 이야기와 각종 계모임에 대해서 많은 도움 말씀을 해 주었다.
한복실 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만큼 젊고 고운 모습인 데다가 키가 훤칠했다. 조사자들이 탤런트 ‘김혜자’를 닮았다고 했더니 그런 소리를 조금 들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지금도 집에서 쉴 틈이 없이 공장이나 농장 등에 나가 일을 하며 다니기 때문에 인터뷰 일정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다. 조사자들은 저녁 늦게야 약속을 잡아 겨우 할머니를 만나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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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한복실)
한복실 할머니는 1943년에 전라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까지 그곳에 살다가 6·25를 겪고 열 살에 인천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갔다. 형제는 1남 5녀로, 위로 오빠가 있고 딸로는 첫째이다.
당시에는 모두들 사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목포에 살 때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6·25를 겪고 인천으로 오면서 더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인 오빠만 학교에 보내고 딸인 한복실 할머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학교는 많이 안 나왔어. 그때는 아버지가 뭐 기집애들은 뭐 하러 갈키냐고 오빠만 갈킨다고 해가지고 오빠만 중학교까지 가르키고 우리는 학교 댕기다 그때는 거기서. 우리는 목포에서 학교 댕기면 문딩이들이 많았잖아. 그래가지고 잡아간다고 그래가지고 학교 댕기다가 말았어. 그러고서 서울로 온겨. 우리 아부지가 안 가르켰어.”
인천으로 온 뒤, 어머니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였고 한복실 할머니 역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 어린 동생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서울 평화시장에서 미싱일을 배우며 일을 하였다.
“태화수라는데 취직해가지고 저기 평화시장 위에 그런데 취직해가지고 자방(재봉)을 해가지고 작업을 수공업 작업을 수공하는데 거기 취직해서 벌어서 먹이고 그랬지. 거기서 미싱했지. 거기 시다 이렇게 두고 잘했어요. 내가 데리고. 두 사람. 그래가지고 벌어먹고 살고 그랬는데. 내가 열여덟 살, 열일곱 살 때부터 일했나봐. 열일곱 열여덟 살 때 키가 이 키였어. 거기 시다로 했다가 한 이삼 년 하다가 한 거지.”
예전에 평화시장은 일을 심하게 시키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느냐고 여쭤보았더니, 밤에 잠 한숨 못 잘 정도로 일을 고되게 시켰다고 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엄청 고생스러웠지만 돈을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밤에는 잠도 안 자고 시켰어. 그 뭐 별로 못 자고 막. 하루에 몇 개씩 빼라는 저기가 있어가지고 수량을. 그러니깐 잠도 못 자고 하는 거지. 그 견뎌서 해야 해 일을”
그러다 아버지가 50대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며 일을 하다가 29세에 적지 않은 나이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당시에 그 나이면 꽤 늦은 혼인이었는데, 홀로 생계를 이끌고 가는 어머니를 도와 드리기 위해 일을 하다 보니 혼기를 놓치게 되었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잡쉈지. 그놈의 술. 나는 시집오면 술 안 먹는 이랑 산다고 큰소리 치고 왔는데, 오니깐 우리 아버지보담 더 잡숴. 말도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