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E01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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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기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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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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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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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리 강당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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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세거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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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부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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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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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강당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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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대 강당말
강당말은 행정구역으로는 사정1리에 속한 마을이다. 강당말은 안동김씨(신안동김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시작도 안동김씨로부터 시작되었다. 강당말은 안동김씨 18대인 김혜 공이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마을을 이루었으니 약 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강당말이란 마을을 있게 한 강당은 언제 처음 건립되었을까.
안동김씨가 사정리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음성 지역과 연관을 맺게 되는데 안동김씨 14대 김유지(金有知)의 세장지가 금왕읍 유촌리에 있게 되고, 15대 김윤조(金胤租)가 삼성면 선정리에 세거하고 있던 전주이씨 성령대군의 후손과의 혼인, 17대 김의견(金義堅)이 음성 원남에 세거하는 문화유씨와 인연, 18대 김혜(金懳)가 금왕에 세거한 초계정씨 판관 정수남(鄭壽男)의 딸과 혼인 등으로 그 기반을 잡았다.
음성 지역에 기반을 잡은 안동김씨가 사정1리에 들어와 강당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대해 사정향토지 『부용』에는 ‘강당말에 안동김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김혜가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 하였으며, 사정1리 골짜기로 피신하여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가르치는 강당(講堂)을 세워 교육의 장이 형성되므로 마을을 ‘강당말’이라 칭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안동김씨가 난을 피해 마을에 들어오면서 강당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강당이 처음 세워진 때에 대해서는 김혜의 경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증을 할 수 있다.
김혜가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해 사정리로 들어와 살다 임진왜란 후 벼슬을 하게 되는데1605년(선조38)에 호조좌랑에 오르고, 1606년(선조39)에 대구판관이 되고, 1619년(광해군 11)에 함경도도사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함경도도사의 개차 요구가 있고 이에 따라 김혜는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1619년(광해군 11)에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사정1리 강당말로 들어와 1637년(인조 15)까지 살았으니 약 18년 정도 살았다.
이때부터 김혜가 강당말에서 살아가면서 벼슬 생활에서 회의를 느낀 후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강당(서당)을 세웠을 것으로 보며, 강당이 세워지고 사정1리에 사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고, 모여서 글공부를 함에 따라 강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강당말’이라 불렀을 것으로 본다.
강당의 본래 위치는 현재 ‘간와당’이라 부르는 강당이 세워진 위치가 아니라, 마을입구 느티나무와 팔각정자, 마을유래비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5~10m 정도 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본래 강당이 있었던 곳에는 강당에서 사용하던 강당샘도 있다.
마을 입구에 있던 강당은 구한말 1909년 가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의병과 일본 경찰과의 싸움에서 일본 경찰이 불을 질러 마을에 있던 집들과 함께 불에 모두 타버리게 되었다. 그 후 30여 년 동안 강당을 짓지 못하고 있다가 1935년 봄 현재의 위치에 강당을 짓게 되었다.
강당 건물은 목조 기와집이며 3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운데 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대청 같은 곳으로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공간이라 여겨지고, 마루 양쪽으로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는데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본다.
강당은 조선시대에는 사정1리 마을에 사는 안동김씨 문중 사람들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의 교육의 장이었으며, 일제시대에는 공회당 및 서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강당말 김두일 새마을지도자(52년생, 56세)는 강당에 대해 “일제시대에 각 지역에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가 세워질 때 미처 설립되지 않은 지역에 간이학교가 세워졌는데, 사정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간이학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강당말에서는 강당의 수리, 보존, 그리고 서당과 간이학교 역할에 따른 학자금 마련을 위하여 강계와 흥학계라 부르는 계를 운영하였다.
강당말은 오늘날 30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안동김씨가 26가구가 되는 안동김씨 집촌으로서 교육의 혼이 살아있는 강당으로부터 마을과 마을이름이 시작되어 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 앞에 정자가 세워져 있고 커다란 돌에 강당마을 유래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