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E020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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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영숙, 조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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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원류분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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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 할아버지 묘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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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김성진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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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진 공 묘비
사정1리는 강당말과 용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강당말은 안동김씨(신안동김씨) 집성촌이고, 용대동은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4월 12일 강당말의 김두일 새마을 지도자(52년생, 56세)를 만나 안동김씨에서 신안동김씨로 나온 이유에 대해 여쭤보았다. 김두일 어른은 신안동김씨가 김선평(金宣平) 할아버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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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세거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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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일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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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1
“선평 할아버지인가? 선평이면 우리 안동, 안동 삼태사라고 있는데, 거기 가보면 고려시대 때 왕건이 삼태사를 알려 준 거래.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가 같은 본이여요. 옛날에 같은 본이라도 혼인을 못 한다 이런 얘기까지도 들렸는데, 거기서부터 신안동이 된 거죠. 안동에 선평 할아버지서부터. 그때 그 할아버지에서 갈린 건지, 딴 성에서 갈린 건지, 그건 잘 모르고. 고려시대 때, 태조 왕건에서 그 저 장군이, 그 훌륭한 사람이 했는데, 그때 당시 너는 안동김씨가 되라, 너는 안동권씨가 되라, 너는 안동장씨가 되라.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 그래서 안동김씨랑 신안동김씨랑 역사 차이가 많이 나요.”
시조 김선평에 대해서 『안동김씨 태사공학파 세기공종회 가승보(安東金氏 太師公鶴派 世機公宗會 家乘譜)』에는 ‘시조 태사(太師) 김(金)공의 휘는 선평(宣平)이니 신라 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함에 공이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더불어 군(郡)으로서 귀부(歸附)하니 태조가 얻어 드디어 병산(甁山)에 승첩(勝捷)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의성(義聲)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게 됨은 공 등 3인의 힘이다. 공(功)에 봉함에 으뜸으로 공을 대광(大匡)에 배하고 권행과 장길로 대상(大相)을 삼으며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주고 태사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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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2
신안동김씨들이 강당말로 들어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쭤보았다.
“18대 김혜(金憓)[1572~1627] 할아버지의 할머니 초계정씨 이 할머니 친정이 여기 금왕이었대요. 그래가지고 할머니로 인해서 이곳 사정리로 오게 되었다는 얘기도 들리고. 제가 듣기로는 그래서 김혜 할아버지가 사정리 여기 오다보면 황석골이라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처음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얘기도 들리고. 강당말에 강당을 세운 할아버지가 김혜 할아버지가 아니냐? 지금은 간와당(簡窩堂)이지만 요즘에 와서 우리가 간와당이라 붙인 것인데, 그래서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사정향토지 『부용』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찬(修撰)벼슬을 하던 김혜(金憓)공이 금왕 초계정씨 처가로 내려와 난리를 피하다가 다시 심심산골 부용산 아래 사정리 골짜기로 피신하여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가르치는 강당(講堂)을 세워 교육의 장이 형성되므로 마을을 ‘강당말’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안동김씨의 강당이 있어서 강당말이라 하게 되었다는 내력이 전래되고 있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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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3
신안동김씨의 시조인 김혜 할아버지가 강당말에 들어온 지는 400~500년 정도 되었다. 김혜 할아버지한테 아들이 4명이 있는데 각각 4개의 파로 나뉘었다. 그중 맏아들 상온(尙溫) 할아버지파가 강당말파인데, 훌륭한 사람이 강당말파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상온 할아버지파가 많지요. 상온 할아버지파가 여기 강당말파, 고 다음에 중통말파, 서적골파, 문수골파 이렇게 나가지요. 파는 내가 지금 혼동이 되는데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지금 사정리에서는 강당말파가 제일 많아요. 반 이상 2/3를 차지하고 있어요. 예, 상온파 큰아들 파가 제일 많은 거야. 훌륭한 사람도 거기서 많이 나왔고. 복지부장관하며 해군 소장하며 그런 사람들도 다 큰할아버지한테서 나왔어”
각 4개의 파로 나뉜 것에 대해서 『안동김씨 태사공학파 세기공종회 가승보』에는 ‘태사공(太師公) 시조 휘(諱) 선평(宣平) 할아버지의 18세손 혜(憓) 할아버지가 사정리에 근거지를 정한 후 후손으로 휘 尙溫(일명 강당말파), 휘 尙渾(일명 문수골파), 휘 尙명(일명 중통말파), 휘 尙澤(서수골파) 네 명의 후예가 400여년을 사정리를 중심으로 살아 왔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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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4
강당말의 중심은 바로 이 김혜 할아버지가 자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강당이라 할 수 있다. 강당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강당은 김혜 할아버지가 처음 세운 후 동학 때 소실되었다가 30년 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교육을 한다고 해서 김혜 할아버지가 강당말에다가 글 배우는 서당을 거기에다 지은 거예요. 서당자리가 지금 간와당 자리가 아니고 마을유래비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있어요. 그 옆에다가 강당을 지은 거예요. 서당자리를, 서당자리를 거기에다 짓고서 거기서 공부를 하면서 고 밑에 보면 강당샘이라고 지금 지하수 뚫은 자리예요 거기에 샘이 있었어요. 지금 사람들이 물어보면 ‘강당은 저 꼭대기에 있는데 강당샘은 왜 여기에 있느냐?’ 그게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강당이 바로 고기에 있었거든 샘 위에, 마을유래비 있는데 바로 고 옆에.”
“그러면 강당이 계속 전해져 내려 왔을 것이잖아요?”
“그렇죠. 거기서 글 배우고 계속 내려오다가 동학 난리라고 있었어요. 아시겠지만요. 동학 난리에 무슨 불이라고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성냥불인가 봐요. 옛날에는 뭐 담이라고는 전부 울타리 담이니까. 그리고 초가집이고 그러니 울타리에다가 불을 붙이니까 그냥 죄 초가집이고 뭐고 다 탔대요. 그때 간와당 강당도 그때 소실되고 강당말에서 두 집인가? 세 집 남고는 다 탔대요. 그때 강당이 없어진 거지요. 없어졌다가 30년인가 몇 년을 지나고 그 후에 지금 있는 자리에다 다시 지은 거지요 강당을.”
“요즘 가보면 그 건물이 좀 신축건물 비슷하게 보이는데 다시 또 지은 것 아니예요?”
“아니요, 보수를 한 것이죠. 보수를 했지요. 건축물의 틀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다시 보수를 한 것이죠. 창문이 바뀌었고 지붕이 조금 바뀌었고.”
현재 강당말에는 신안동김씨가 90% 이상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분들? 80%. 사정리 전체에 80% 보면. 강당말에는 80%넘지요. 90% 이상 봐야죠. 가구 수가 한 30호 되는데 90%이상 보면 되지요.”
“아직도 이런 집성촌을 이루는 마을 많지 않은데 단합은 잘 될 것 같아요?”
“단체는 잘 되지요. 그러니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허허허, 집안이다 보니까 할 말도 막 못할 때가 있고 어느 때는 ‘아~ 그 사람 뭐 그렇지 않아’ ‘그래도 뭐 어떻게 해? 이해하고 서로 저기해야지’ 이렇게 지낼 때도 있고 서로 각 성거지 같으면 안 된다, 된다, 확확 밀고 나갈 때도 있지만. 서로 다 집안이고 완전 각 성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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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5
조상들을 어디에 모시고 있는지 여쭤보니 원래 묘에 각기 모시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납골당을 만들어 한자리에 모시고 있다. 가을에 시제를 지낼 때는 자손들이 한 300명 정도 모일 정도로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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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공동 납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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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납골당
“김혜 할아버지가 원래 정석도 뫼로다 있었어요. 뫼로 다 있었고 상온 할아버지와 후번(后蕃) 할아버지 이렇게 하면 삼대가 되는 것 아니예요? 혜, 상온, 후번 요 삼대가 이렇게 있었어요. 그러다 요즘에 와서 다시 납골당을 하는 것이 어떠냐 그래서 납골당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사정리 분으로만 따지면 요기서부터 요렇게 되지만, 학(鶴) 할아버지(6대) 따지면 남한에 아마 수천이 되요. 남한에 학 할아버지 밑으로 하면 제가 거기까지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가을에 시제를 지내려고 보면 한 300명 정도 모여요 여기에. 강당말만 해도, 역사로 따져도, 연도로 따져도, 우리 신안동김씨가 많아요.”
2월 28일 찾아뵌 김장일 할아버지(37년생, 71세)는 선조들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해 여쭤보니, 안동김씨가 중국에 사신을 갔다가 중국 임금을 비판하는 바람에 안동진씨가 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중에 임금께 호소해 대부분은 다시 복성을 했는데 시골에 묻혀 살아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은 복성을 하지 못해서 그대로 안동진씨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문중 모임을 할 때 안동진씨들이 진씨도 포함시켜 달라고 왔었는데 복성을 안해서 거절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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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시중공파 세보에 있는 복성
“성진(成鎭) 할아버지가 복성을 했지. 그 저기, 우리 안동김씨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저 뭐 밑에 앉혔다고 뭐라고 하더라? 오랑캐 왔는데 안 좋다고 항의를 해가지고 중국 왕이 여기 임금한테 죽이라고 그랬대잖아, 안동김씨가 갔는데. 그래가고선 할 수 없이 성을 바꿨다는 거 아냐. 저기 임금이, 그 사신이. 중국 사람 가라 그랬어도. 그래서 안동진가가 됐었잖아 그게. 그래서 지금도 마취골이라던가 어디 가면 진씨가 있댜. 복성을 못한 사람들이. 제 성을 못 찾고 그저 진씨들이라고. 교수도 있고. 그래가지고 (성을 되찾으려고) 쫓아다니고 그랬었어.”
“아, 김씨였는데 진성이 됐다가 다시 김씨가 된 거예요?”
“요기요기 지금 납골당에도 비석이 있고 우리 납골당에도 비석이 있거든? 근데 인제 내진 씨하고 성진 씨하고 두 분이 암행어사 행차라나 뭐, 임금이 행차를 했다나 말길을 잡고서 우리 성이 이렇게 됐다고. 그래서 안동 김가 찾았댜. 그랬는데 그때 각자 숨어서 퍼서 살고 통신망이 있나 옛날에. 그래서 진가가 그저 있대잖아. 복성을 못하고. 인제 그걸 할라고 평생을 다 하고 진교수라고, 하고 그랬어도 복성을 못했다잖아. 할라다 할라다 못하고 여태 진가로 있어.”
사정향토지 『부용』에 「세보(世譜)」에는 안동김씨가 안동진씨가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학(金鶴)이 원(元)나라 사신 자리에 있을 때 북적(北狄)에 유어하(游魚下) 설어상(雪魚上) 두 나라가 있었다.(이는 곧 물에서 사는 민족과 눈에서 사는 민족을 가리킨 듯하다.) 공이 분연히 물러서며 말하기를 “의상지치(衣裳之治)의 유생이 오랑캐 대열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원주(元主)가 말하기를 “너의 나라도 역시 동이(동쪽오랑캐)이다.”하였다. 이에 대꾸하여 말하기를 “폐국(자기나라)은 예악(예절과 음악)과 문물이 무괴(無愧) 하다고 칭하면서 소중화(小中華)는 유설(游雪)간에 비견(비슷)하다 함은 부당하다.” 하였다. 원주가 노하여 본국에 죽이도록 명하였다. 원은 가상하여 그 절개를 용서하고 삼척(三陟)에 숨어살며 진씨(秦氏)로 변성(變姓)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림으로 그려 보이며 상하(上下)로 더 보태거나 깎아내어서 은연중에 김자(金字) 격식을 갖춰 근본을 잊지 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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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문중이야기7
마지막으로 신안동김씨의 문중 모임에 대해 김장일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대종계는 사정리 제일 큰 계고, 파종계는 아들이 넷이 나오는데, 강당말파, 문수골파, 중통말파, 서수골파, 이렇게 4파로 나눠졌어. 근데 강당말파가 우리가 맏이인데 큰 아들파여.”
파종계는 음력 10월 26일에 김장일 할아버지 댁에서 하며, 그날 강당말계도 같이 한다고 한다. 파별 시향은 납골당이 생기기 전에는 음력 10월 초하루 날부터 한 분당 하루씩 했는데, 납골당을 만든 이후부터는 음력 10월 3일 한 날에 다 같이 한다. 사정리 안동김씨 4파 중에 2개는 납골당이 있고 2개는 납골당이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없는 파는 지금도 산에 묘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