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E02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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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영숙, 조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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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일을 해 돈을 모았는데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밥을 하러 광에 가보니 쌀독에는 아무것도 없고 팥만 서너지기 있었다.
“집에서는 일꾼에, 세상에 막내딸에 큰집 작은집 우리집이 성들 오빠들 다 장개 보내고 나 하나 막내딸이라고 꽃방석에 앉혀놓고 키웠는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눈물이 막 나더라고.”
눈물을 닦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인기척이 나서 대문을 내다보니 누가 둥그목을 슬쩍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시아버지께서 광으로 가서 쌀 서너말을 놓고 가셨다. 강정순 할머니는 뭘 팔아서 쌀을 사오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름에 일해 준다는 조건으로 선품값으로 받아온 것이었다. 그만큼 시댁이 가난했다.
“아홉 식구가 보리를 한 말 팔아오면, 나물만 무쳐서, 점심, 저녁으로 한 대접씩 먹고. 아침에는, 저 좁쌀 한 그릇을 맷돌에 타서, 그거 나물 섞어서 죽쒀먹고. 그렇게 먹어야 아홉 식구가 닷새를 먹어요.”
시집오고 그 다음 달부터 일을 하러 다녔다. 들에 가서 신랑하고 똑같이 일하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3년이 지나니깐 쌀이 좀 생겨서 아침에는 보리밥 먹고, 점심으로는 여전히 나물을 먹었다. 다시 그렇게 1년을 더 하니깐 삼시세끼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니깐 집안이 될라면은 벌써 들, 밭이고, 논이고 곡식이 뭔지 알아봐요. 죄 지나감스롱 그저, 아이고 아무개씨는 뭔 거름을 해서, 지금은 비료나 주지, 옛날에는 오줌주고 퇴비했지. 뭘 했길래 이렇게 곡식이 좋아, 지나감스롱. 아이고 곡식이 잘됐네. 잘됐네”
지금 당장은 논밭이 없어도 미리미리 사람들에게 농사비법을 물어보며, 그렇게 3년을 알뜰살뜰 모아서 논 넉 마지기를 샀다.
낮에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물을 뜯고, 밤에는 나물을 삶고, 첫 닭이 울면 무극장에 이고 가서 삶은 나물을 팔고, 집에 와서 점심에 나물 한 그릇 먹고 다시 산에 올라가서 나물 뜯었다. 남편이 같이 일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쉬고 있으면 “이리 와서 잠깐 쉬어서 하라고, 하루 살고 말 것도 아니고 몸을 그렇게 쓰고 어떻게 사냐고.” 하며 말릴 정도로 강정순 할머니는 열심히 일을 했다. 모를 심을 때도 “사람들이, 손으로 심구는 거유 기계로 심구는 거유?” 하고 물어볼 정도로 빠르고 열심히 일을 했다. 한 마지기를 다 심어야 쉬고, 베를 짜도 하루 한 필을 다 짜야 그만 두었다.
“구경 온 할머니들이 물어, 도대체 기계로 짜는 건지 손으로 짜는 건지 모르겠네. 아유 손으로 짜는 거유. 이건 북이고 이건 바느질이고. 이러며 짠다고”
동네 품은 빠지지 않고 다 다니고 항상 베도 짜러 다녔는데, 그때 너무 허리를 구부린 채 일을 해서 지금도 허리가 굽어 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3년 뒤에 밭 1000평을 사고, 또 돈을 모아 밭 610평과 논 여덟 마지기를 사고, 얼마 뒤에 논 두 마지기를 샀다.
“애들 때부터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는데, 이 드러운 데 걸려가지고. 영감님 보고 그랬지. ‘여바요, 우리가 여기서, 이 산골에서, 우리 인제 여덟 마지기면 우리 식구 지면 먹고, 밭도 벌써 1,710평이면 우리 밭 붙여서 우리 식구 먹으니깐 앞으로 돈을 모으자.’ 돈을 모아서 이천 같은데, 이천에 우리 육촌들이 살걸랑. 넓은 데 가서 논이라도 사놓으면 이 담에 애들이라도 넓은 데 가서 살지, 우리마냥 산골에서 고생을 시킬 꺼냐.”
아이들을 위해 이천에 땅을 사기로 하고 쌀이 102가마를 모았다.
“‘이천 한 번 나가봐요.’ 겨울이여. 동짓달이여 동짓달. 잊어버리지도 않아. 동짇달 스물아흐레날. 참 옛날인데 그게 못이 되가지고 안 잊어버려”
땅금을 알아보라고 남편을 보내는데 “지금은 논 두마지기 밖에 안 된다고, 나중에 사자고” 하며 남편이 그냥 돌아왔다. 그래서 강정순 할머니는 “첫 숟가락에 배부르냐”고 남편을 다그치며 “지금 두 마지기만 사고 한 3년 더 해서 더 사자”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음력 2월 29일’에 시누이 남편이 돈을 빌리러 왔다고 한다.
“할머니한테 백만원이나 십원이나 일원이나, 딱 할머니 앞에 두 손으로 딱 갖다 놓고 ‘여기 돈 있어요 어머니’ 하고 드리지, 우리는 십원 한 장도, 아들이나 내나 구경을 못하고 못 만지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신발도 떨어질까봐 항상 들고 다녔는데 그 큰돈을 성큼 사위에게 빌려 준 시어머니가 야속하고 서운해서 아직까지도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단다.
1996년, 강정순 할머니 68세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76세였다. 시어머니에 이어서 6년 동안 남편의 치매 병수발을 하였다. 남편이 아무 곳에나 불을 놓아서 불이 날까 무서워 강정순 할머니가 항상 따라다녔다.
“혼자 그 고통을 겪는데, 조금만 대문 앞에만 발 내놓으면 대문 앞뒤에 서서 ‘이년아, 서방을 열둘을 해놓고 어느 놈을 만나러 다니냐’고 막 사람을 패고, 치매라.”
강정순 할머니 혼자 너무 고생하는 게 안쓰럽고 죄송하여 자녀들이 서울로 모시고 갔는데, 가고서는 4, 5달 정도 후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