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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11
한자 砥柱中流碑
영어의미역 Monumental Stone of Gil Ja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산 2[지주중류2길 1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금석각류|기타비
양식 일반형 비석
건립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길재(吉再)
재질 사암
높이 320㎝
너비 109㎝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산 2[지주중류2길 19]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문화재 지정일 1983년 6월 20일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비.

[개설]

야은 길재는 고려 후기의 인물로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서 배웠으며,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태종이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후세 사람들은 길재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이라 일컬어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을 추모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 주었다.

모친에 대한 효도도 지극하였으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그 학맥을 이었다.

지주중류비길재 묘소 인근에 세운 기념비이다. 지주(砥柱)란 중국의 허난 성(河南城)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가리키는데, 황허 강이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지주산에 부딪치지만 쓰러지지 않았기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킨 길재를 이 산에 비유한 것이다.

[건립경위]

야은 길재는 불사이군의 굳은 의지를 보여 초야에 묻혀 은거하며 절의를 지킨 인물로서, 그의 충절과 학덕을 숭모하던 조선시대의 인물인 유운용(柳雲龍)이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부임하여 묘소를 참배하러 왔다가 중국의 지주중류비에 빗대어 그를 기려 비를 세웠다.

[위치]

구미시 오태동 오태마을 왼쪽 편의 동북쪽으로 뻗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야은 길재의 무덤 앞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비석의 재질은 사암이며, 덮개돌 없이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에 각이 있는 직수(直首) 형태이다. 비신은 높이 320㎝, 너비는 109㎝, 두께 37.5㎝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중국에서 탁본해 온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를 새겼고, 뒷면에는 유성룡이 지은 ‘야은선생지주비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현황]

지주중류비는 처음 세운 비석이 비바람에 마모되자 1780년(정조 4)에 다시 세운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 정비가 잘 되어 있는 등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야은 길재는 충절과 학덕으로서 후세 인물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학문과 삶을 본받고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늘 존경해 마지않았던 인물로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의 불사이군의 절의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