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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훈 거사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18
한자 洪坃去思碑
영어의미역 Monumental Stone of Hong Hun
이칭/별칭 순상홍공휘훈거사비(巡相洪公諱坃去思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인의구획지구 48블록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재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금석각류|선정비
양식 일반형 비석
건립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홍훈
높이 222㎝
너비 54㎝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인의구획지구 48블록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조선 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던 홍훈의 선정비.

[개설]

홍훈은 음사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875년(고종 12)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하였다. 관찰사로서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875년에는 부민(富民)과 지방 사족(士族)에 대한 수탈과 침학이 극심하여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세납물을 갖가지 방법으로 횡령, 남징(濫徵)하여 15만 냥 이상을 축재함으로써 경상도민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부호군 이붕순(李鵬純)이 상소를 올려 처벌을 원하였으나 왕과 민씨 척족의 비호로 오히려 이붕순의 상소를 무고라 하였다. 같은 해 울산에서 수령과 이서배(吏胥輩)의 혹심한 수탈로 농민이 봉기하여 동헌을 습격하고 감옥을 파괴하자 울산부사 정홍대를 파직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녹봉이 일부 감하여졌다.

1876년 경상도관찰사에서 물러난 뒤 경상도암행어사 홍대중(洪大重)이 그의 혹독한 탐학과 공물(公物)의 횡령을 보고함으로써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등 선정을 베푼 것으로 보기에 어려운 부분이 사서의 기록에 나타난다.

[건립경위]

홍훈이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하여 인동부를 순력한 후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었다 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형태]

높이 176㎝, 너비 54㎝, 두께 26.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이다. 덮개돌은 높이 46㎝, 너비 98㎝, 두께 76㎝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순상홍공휘훈거사비(巡相洪公諱坃去思碑)’라 새겨져 있고, 왼쪽 면에 ‘경진팔월일(庚辰八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이 비가 188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구미시 진평동 구미시인동도서관 내에 인동의 각지에 산재해 있던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거사비 등의 비석을 옮겨와 정돈해 놓은 곳에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경상도관찰사 홍훈에 대해서는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부정한 행위를 저질러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선정을 베푼 관리로서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벌을 받은 4년여 후에 주민들에 의해 거사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조사와 연구 등의 뒷받침이 필요한 유적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5.14 [현황] 수정 '구미시립도서관 인동분관'을 '구미시인동도서관'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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