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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272
한자 李尙逸
영어음역 Yi Sangil
이칭/별칭 여휴(汝休),용암(龍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00년연표보기
몰년 1674년연표보기
본관 벽진
대표관직 황해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 평정공(平靖公) 이약동(李約東)의 후손이며 승지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군수 이석명(李碩明), 아버지는 현령 이민선(李敏善), 어머니는 김봉(金崶)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상일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의 문란한 정사를 피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여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광평동에 살았다. 1623년(인조 1) 사마시에 뽑혀 생원이 되고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했다. 1630년(인조 8)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다시 승정원주서가 되어 사실(史實)을 기록하는데 그 필한이 물 흐르듯 유려하여 인조가 기뻐하면서 말을 하사하였다.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예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1636년(인조 14) 황해도도사가 되었다.

황해도도사로 재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과 백성을 격려하여 산성을 보전하였고 때로는 장사(壯士)를 내보내 오랑캐를 쳤다. 하루는 오랑캐에게 잡혔던 아녀자들 수백 명이 탈출하여 성 밖에 몰려오자 이상일은 성문을 열어 받아 들였다. 적장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엄포를 놓았으나 이상일은 성문을 굳게 지키고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이렇게 큰 공을 세우고도 알리지 않았으니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1639년(인조 17) 예조정랑이 되고 사헌부지평으로 옮겼다가 어사가 되어 영남을 안찰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이 되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과 함께 전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곧 풀려나와 이듬해 진위겸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淸)에 다녀오고 진주목사가 되었다.

1655년(효종 6)에 안동부사가 되고 얼마 안 되어 정주목사가 되어 문교(文敎)가 부진함을 보고 향학 진흥에 전념하여 크게 진작시켰다. 다시 길주목사로 부임하여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한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받아 들여 시정됨이 많았고 상을 하사하기도 했다. 1662년(현종 3)에 다시 영해부사가 되었다가 경주부사에 올랐고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형조참의로 떠나자 경주부민들이 길을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

이후 호조참의, 동부승지, 좌부승지에 올랐으며 영남백(嶺南伯)이 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크게 학교를 부흥시키고 민폐를 고쳤다. 강원감사를 역임하고 산수가 빼어난 청풍부(淸風府)에 부임하였을 때 한재(旱災)가 크게 들자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을 성의껏 구휼하고 수리(水利)를 일으켜 농토를 만드니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 1673년 효종의 능침(陵寢)을 천봉(遷奉)할 때 공조참의로 그 일을 마치고 우제(虞祭)가 끝나자 낙향하여 상소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조정에 나아가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그 해 8월 27일에 생애를 마쳤다. 이상일은 평소 효와 근신을 행실로 삼았고 청빈하였으며, 우애가 극진하여 아우들을 사랑함이 대단했다.

[저술 및 작품]

강원감사 재직 시 선산의 만고충절 세 사람, 곧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명(明)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일선(一善)으로 귀향한 충정공(忠貞公) 농암(籠巖) 김주(金澍),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수양대군에게 희생당한 사육신의 하나인 진양인(晋陽人)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단종의 충신으로 살면서 충절을 지킨 벽진인(碧珍人)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의 사적을 엮어 『삼인록(三仁錄)』을 저술하였다. 이를 계기로 삼인사(三仁祠)가 세워지고 이후 월암서원(月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묘소]

묘소는 본래 성주(星州) 선령산(仙鈴山)에 있었다가 구미 파계리(巴溪里) 뒷산으로 이장되었으나 그곳이 구미공단에 편입되는 바람에 경상북도 구미시 비산동 뒷산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문을 찬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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