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다카키 쇼오지 구황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38
한자 高木昌治救荒碑
영어의미역 Monument of Takaki Shoji's Famine Relief
이칭/별칭 유지 고목창치군 구황기념비(有志 高木昌治君 救荒紀念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인의구획지구 48블록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송덕비
건립시기/일시 1930년 1월연표보기
관련인물 다카키 쇼오지[高木昌治]
재질 화강암
높이 106.5㎝
너비 38.5㎝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인의구획지구 48블록지도보기
소유자 구미시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다카키 쇼오지[高木昌治]의 칭송비.

[건립경위]

다카키 쇼우지는 일본인으로서 인동우체국 근처에서 살았다. 인동 지방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잘 알려진 그는 곡물상을 운영하였는데, 특히 함경도까지 왕래하면서 조를 많이 취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6년부터 흉년이 계속 들어 기근이 심했을 때, 곳간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해 주었다. 인동면민들은 그의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1930년 1월 구황비(救荒碑)를 세웠다.

[위치]

다카키 쇼오지 구황비는 구미시 진평동 인의구획지구 48블록 구미시 인동도서관 후정에 있다. 구미시인동도서관은 인동사거리에서 천평 방향으로 나가다가 육교를 지나면 오른쪽 편 골목 안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회색 화강암이며, 높이 106.5㎝, 폭 38.5㎝, 두께 15.5㎝의 몸돌 위에 높이 30㎝, 폭 64.5㎝, 두께 43㎝의 지붕형 머릿돌을 얹었다. 사각형 형태의 받침대는 시멘트이다. 비문은 앞면에 비 제목과 비 명문(銘文)이 있고, 비 왼쪽 옆면에는 건립 연월일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비교적 선명하여 글자를 알아보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유지고목창치군구황기념비(有志高木昌治君救荒紀念碑)’라 새겨져 있고, 양쪽으로 글을 새겨놓았다. 한발로 향민들의 고통이 심할 때 다카키 쇼오지가 곳간을 열어 향민들을 구제하니 향민들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오래 간직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비석 왼쪽 옆면에는 비를 세운 시기를 적고 있다. 비문을 쉽게 적으면 아래와 같다.

한발위재(旱魃爲灾)   한발이 재앙이 되어서

왕혹인향(尢酷仁鄕)   어진 마을을 가혹하게 하였는데

유군연의(維君捐義)   오직 그대 의로움을 내어서

경균진황(傾囷賑荒)   곡식 창고 열어 황폐한 고을을 진휼했네

정심구재(情深九載)   정이 구년 세월 깊어가서

송전일방(頌傳一方)   송축이 한 지방에 전하니

편석기은(片石紀恩)   한 조각의 돌에 은혜를 기록해

영시난망(永矢難忘)   길이 잊기 어려움을 맹세하노라

[현황]

다카키 쇼오지 구황비는 원래 인동초등학교 뒤편 우시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구미시 도시 계획으로 인동 지역이 개발될 때, 흩어져 있는 유물, 유적들을 정비하면서, 비지정 문화재로 분류된 비석들은 2001년 7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비석은 다른 여러 비석과 함께 구미시립도서관 인동분관 뒷마당에 나란히 세워져 있고, 비 앞에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의의와 평가]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이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한국인들에게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그 은혜를 입은 한국인들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한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은 미담이다.

구미시 구포동에 본적을 둔 장상진(張相軫)의 증언에 의하면, 다카키 쇼오지는 해방 후 고향 오사카로 돌아갔는데, 그 후 자손들이 진평동을 방문하여 기념비를 돌아보고, 이곳 주민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돌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고목창치 구황비는 한일 민간 교류의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장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5.14 [위치] 수정 '구미시립도서관 인동분관'을 '구미시인동도서관'으로 수정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