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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진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39
한자 緋山津戰鬪
영어의미역 The Bisanjin Battle
이칭/별칭 비산진 혈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비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북한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950년 8월 5일 23시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 8월 6일 새벽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비산나루터
관련인물/단체 국군 제15연대|북한군 제15사단|미군 제1기병사단

[정의]

1950년 8월 6·25전쟁 시 국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渡河)를 저지하기 위해 비산진에서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6월 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 대전(大田)을 장악한 뒤, 8월 15일까지는 낙동강 선을 넘으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7월 말 북한군 제15사단(총병력 약 5,000명)은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주(尙州) 정면에서 공격 중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군 제1기병사단의 주력과 미국군 제8군 제27연대 및 국군 제15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황은 위급하였다. 워커(Walton H. Walker) 사령관은 미군 제27연대에게 낙동강으로의 철수 준비를 명령하였다. 이때 그는 도쿄에 있는 앨먼드(Edward M. Almond) 참모장에게 “대구가 언제까지 안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군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7월 27일 맥아더(Douglas MacArther)가 직접 대구에 와서 “미군 제8군은 현재의 전선을 확보해야한다”고 강조하고 도쿄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군 제25사단은 상주를 포기하였고, 미군 제1기병사단도 김천으로 철수하였으나, 제5기병연대 제2대대는 작오산(鵲烏山 : 303고지)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타임즈』에서는 “한국의 전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도될 정도였다. 비산진 전투는 ‘낙동강 선의 고수냐 죽음이냐’가 관건이었던 위기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목적]

비산진 전투는 북한군 제15사단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발발하였다.

[발단]

국군 제15연대는 8월 4일 인동국민학교(仁同國民學校)에 집결하였고, 이날 오후 3개 대대를 낙동강 강안에 배치하는 한편, 연대지휘소를 가산(架山) 소복동(召福洞)에 설치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지리적으로 도하작전(渡河作戰)에 유리한 지역을 찾아 정탐부대를 앞세우고 낙동강 강안(江岸)으로 들어왔다.

북한군은 도하를 위해 속칭 지푼다리인 홀소와 북삼(北三)의 마진(馬津)나루터를 이용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기만적으로 병력 일부를 낙동강 비산진으로 접근시켜 정찰과 동시에 소부대 병력의 급속한 도하를 추진하면서 비산진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북한군은 8월 5일 밤과 6일 새벽에 홀소나루터와 비산나루터[緋山津]에 각각 증강된 1개 중대를 투입하여 도하를 꾀하였다. 이것은 북한군이 마진나루터를 주요 도하지점으로 선정한 것을 기만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는 인동의 구포동(龜浦洞)임수동(臨洙洞)에 위치한 낙동강 동안(東岸)의 장암산(壯岩山 : 157고지)과 동락(東洛)나루터 사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각 중대로 하여금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강안(江岸)을 탐색하게 하였다.

대대의 중앙일선인 제5중대 정면의 비산나루터는 옷을 걷고 물을 건너는 도섭(徒涉)이 가능하고 강변 기슭에는 높이 70m의 봉명고지(奉名高地)가 있으므로 도하에 유리하였다. 제5중대는 이러한 지형의 특징을 감안하여 북한군이 급속하게 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8월 5일 저녁 강변에 미리 대비한 전초진(前哨陣)에 병력과 화기를 배치하였다.

이날 밤 23시경 북한군의 요란한 사격이 시작되자 중대장은 그들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한국군 안병길(安炳吉) 이등중사 이하 10명으로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대안(對岸)에 침투시켰다. 전투정찰대가 출발한 얼마 뒤에 부중대장인 선임장교가 강을 건너온 피난민 속에 끼어든 북한군의 편의대(便依隊) 2명을 체포했다. 또 중대의 좌단(左端)에서도 이곳 강안에 침투한 북한군 1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전투정찰대는 강 건너 무명고지 북쪽으로 건너가 84고지 일대를 정찰하다가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인 북한군 약 1개 중대를 목격하였다. 전투정찰대는 북한군과 너무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지만 물러설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찰대장이 대원들에게 손으로 사격신호를 하자마자 급속한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마구 던졌으니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도전이었다.

북한군은 난데없이 가해진 기습에 당황하여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를 틈탄 전투정찰대는 재빨리 중대로 복귀하였다. 한국군 피해자는 경상자 2명뿐이었다. 그러나 약 1시간이 지났는데도 북한군이 접근할 징조가 보이지 않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중대장이 조명탄을 발사하게 했다. 그랬더니 전방 20~30m 수면에 30~40개의 대나무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 뒤 40~50m에는 1개 중대 병력이 후속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에 중대장이 예광탄(曳光彈) 1발을 신호로 일제 사격과 수류탄의 투척을 명령하였다. 화력은 수중에 작열했다. 때를 같이하여 북한군의 포탄도 한국군의 진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전이 약 10분간 계속되는 동안, 수중의 북한군은 대부분 격멸되고 그 일부는 대안으로 후퇴하였다.

중대장은 60m 박격포로 강기슭에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막았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중대장은 제3소대의 증강된 1개 분대를 이끌고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무명고지 일대까지 정찰했으나, 북한군은 보이지 않고 부상병만 10여 명이 웅크리고 있었음으로 그들을 붙잡아 중대로 복귀했다.

[결과]

8월 5일과 6일 사이 야간에 벌어진 비산진 전투에서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 제5중대 소속 전투정찰대는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 중대 병력을 거의 섬멸하였다. 한국군의 손실은 부상자 5~6명에 불과하였으나 북한군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격전을 치른 6일 새벽, 물위에 떠내려가는 시체만도 49구가 확인되었고, 사로잡은 포로 수도 10여 명에 이르렀다.

비산진 전투가 끝나자 대대에서는 북한군의 접근을 조기에 경보할 수 있도록 특공대를 편성하여 대안에 침투시켰다. 한편, 비산진의 남쪽에 위치한 홀소나루터와 약목면(若木面) 덕산동(德山洞) 대안(對岸)에서도 8월 6일 새벽 전투가 벌어져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군 제15연대 제1대대는 8월 8일 마진나루터를 도하하여 석적(石積)의 남율동에 위치한 하의산(霞衣山) 고지를 점령하고 들어온 북한군과 격전을 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비산진 전투가 전개된 것은 8월 초순이었다. 이때는 전황이 미군사령부의 부산 이동을 논의할 만큼 첨예한 위기 상황이었다. 비산진 전투의 승리로 인해 한국전쟁에서 국군의 왕성한 전투력을 입증하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낙동강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북한군의 전력과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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