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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47
한자 權永海
영어음역 Gwon Yeongh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대구광역시
성별
생년 1888년연표보기
몰년 1946년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경력 진평교회 목사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권영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상백 등과 함께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약 20매를 가지고 진평동에 사는 이상백(李相柏)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권영해는 이상백의 권유를 받고 이범성(李範成)·이내성(李乃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허도언(許道彦) 등과 함께 거사일을 3월 12일로 정하고 지역 주민의 규합에 나섰다.

3월 12일 되자 이상백·이내성 등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동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붓으로 쓴 독립선언서도 마을 곳곳에 붙였다. 오후 8시경 마을 뒷산에서 동민 약 200명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해산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약 20명을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밤 9시에 약 30명을 규합하여 마을 뒷산에서 밤늦게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인 3월 14일 저녁 9시경에 동민 40여 명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박명언 등과 함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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