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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56
한자 金榮得
영어음역 Gim Yeongdeuk
이칭/별칭 유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8년연표보기
몰년 1949년연표보기
본관 일선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김영득은 호는 유영(幽影)이며, 아버지는 김현묵(金賢默)이다.

[활동사항]

김영득은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이갑기 등 학우들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다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5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이후 문예 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 운동에 전념하였다. 김기림, 한설야, 정지용, 임화, 이효석, 백기만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9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하여 1930년 4월까지 활동하였다.

1931년 8월 서울에서 추완호, 박영희 등과 함께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이동 극단 신건설사(新建設社)를 조직하여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8월 2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35년 12월 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7년 12월 극단 신건설사 사건으로 임화(林和) 등과 함께 전주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형을 받았으나 1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의정부에서 조선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수선화(水仙花)」를 완성하였으나, 개봉을 며칠 앞둔 1949년 1월 4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제의 압제 하에서 유랑하는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유랑(流浪)」, 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 투쟁을 그린 「혼가(昏家)」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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