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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아이도 점지해주시는 서낭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A020302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호

동제인 주산제사와는 달리 뒷개들 들머리 쪽의 해평김씨 재실이 있는 시중사(侍中祠)에 모신 석상에 대한 서낭제사가 있었다. 예전에 주민들은 석상을 모셔둔 이곳을 서낭당이라고 하여 특히 애 못 낳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정성을 드렸다. 이 석상을 서낭당으로 하여 모신 유래는 여전히 주민들 사이에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해평큰마와 해평들을 마주보고 있는 오상동(五相洞, 오늘날의 오상리를 가리킴) 가망못이 있는데, 이 못둑에는 해평김씨의 시조인 장렬공(莊烈公) 김훤술(金萱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현인(縣人)들이 세워 둔 석상(石像)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재(訒齋) 최현(崔晛) 선생이 저술한 『일선지(一善志)』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김훤술의 석상은 뒷개들 들머리쪽으로 옮겨졌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다.

오상동의 가망못은 옛 25번 국도변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변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김훤술의 석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상 앞을 지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서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인가는 모르겠으나 임금의 명을 받아 부산으로 급히 향하던 병마절도사 정도의 한 고위관리가 석상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부가 그 관리에게 하마비가 있으니 말에서 내리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고위관리는 지금 임금의 명을 받잡고 급히 가는 길이기에 그냥 가자고 하면서 말에 채찍질을 가하였다. 그런데 탄 말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도저히 갈 수 없었다. 화가 난 관리는 말에서 내려 요망한 것이라고 하여 석상의 머리를 칼로 베어버리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해평 지역의 관아에 지시하기를 이 석상을 낙동강에 갖다버리라고 명하고는 떠나갔다. 근방의 사람들이 그 명대로 목이 달아난 석상을 끌고 강으로 옮겨갔지만 힘이 들어 강가 숲 근처에다 그만 버리고 가버렸다.

그 후로 마을에서는 괴질이 돌고 젊은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던 중 마을의 한 노인이 꿈을 꿨는데, “내가(김훤술) 강가 숲 까시개이(까시장)에 누워 있는데, 나를 구출해주면 동네에 평안을 갖다 주겠다.”하였다. 뒷날 꿈에서 일러 준 곳에 가 보니, 정말로 꿈에서 본 모습의 석상이 있어서 주민들은 그 자리에 집을 짓고 석상을 동네 수호신으로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주산의 마을제사와 함께 매해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5·16 때까지 하였는데, 그 이후 군위군 군위읍 정동(政洞) 일대에 세거해오던 해평김씨의 종파에서 수호석상이 바로 자신들의 시조상(始祖像)인 사실을 확인하고 고유식(告由式)을 가졌다. 이후 건물을 중수하고 신도비를 세워 해마다 제향행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승모의 논문인 「성황사의 민간화와 향촌사회의 변동」에서도 상세한 내막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유식은 1973년 8월 26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마을의 수호석상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주산제사 못지않았다. 제관은 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에서 아이를 얻기 위해서 지원하였다고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먼저 낙동강에서 목욕을 하고 제사를 모셨는데, 제를 지내고 돌아올 때 맨 먼저 만나는 사람이 남자면 아들을 낳고, 반대로 여자를 맨 처음 만나면 딸을 낳았다고 한다. 실제로 동네의 아무개는 ‘서낭당 제사를 마치고 누구를 만나서 낳은 아들’이라거나 하는 말들이 많았으며, 때로는 ‘해평장림의 숲 기운을 받아서 아무개를 낳았다’는 이야기들도 많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석상에 옷을 해 입히면 재수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오늘날 시중사김훤술 석상에는 심의(深衣)가 입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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