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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의 농작물 변화를 경험하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102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대개 우리나라 농촌마을의 대표 작물이었던 벼는 주민들의 주요 식량이자 현금 소득원이었다. 신동도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을에 남아 있는 잠업 관련 건물들을 보면, 신동은 1950년대 이후 세 차례의 농작물의 변화가 있었다. 우선 벼농사가 주된 것이었으며 이와 함께 보리, 담배, 누에, 참외가 그 쇠퇴를 같이 하였다. 보리는 누에를 치기 전까지 벼와 함께 대표적인 이모작 작물이었으며, 누에를 키우기 위해 보리 대신 뽕나무를 심으면서 경작하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누에를 키우기 전까지 훌륭한 농가 소득원이었던 담배도 국가의 적극적인 누에치기 장려시책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신동에서 담배농사는 주민들에 기억에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도부터 누에를 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상당수 주민들은 벼농사와 담배농사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한다. 누에를 치기 시작하면서 잠실이 많이 지어졌고 기존의 담배를 건조했던 담배건조실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잠실만 일부 남아 있어 누에농사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칠곡군 석적에서 참외농사를 하던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와 참외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몇 명의 마을 주민이 참외농사에 더 뛰어들며 198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참외농사를 경작하여 농가수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신동의 농업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배추를 경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을사람들의 말에서도 보이는데 예전부터 마을에서는 배추를 키우지 않고 ‘갯들’이라고 하는 낙동강변의 채소재배를 하는 마을에서 구입하거나 인동장에서 배추를 전량 구입해서 먹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무나 배추 등 밭작물이 잘 되지 않는 토질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점토질 토양은 벼농사에는 유리할 수 있어도 밭작물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동의 생업형태는 전근대사회 이전에는 벼농사 외에 상품작물의 재배가 불리한 것이 1950년대 이후 수많은 경작물의 변화가 있었던 배경으로 보인다. 지금도 신동에는 특수작물의 재배가 전무한 상태로 벼농사가 주된 경작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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