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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당과 청천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20202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사천공이 살림 난 집은 5대를 이어오다가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래서 여헌선생은 1592년 4월에 피란을 나가서 난리가 평정되어도 고향에 돌아올 수가 없어서 15년 동안이나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606년에 만회당(晩悔堂)공이 주동이 되어 모원당(慕遠堂)이 준공되자 비로소 옛터에 안주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식구는 선생 내외분과 7세된 아들 응일(應一)뿐이었다.

모원당의 규모는 2칸 방이 하나, 2칸 마루가 하나, 마루 옆에 좁은 협실이 있는데 아마도 서책을 보관하였을 것이다. 선생은 초라한 집이나마 여기서 안정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강론을 했을 것이다.

시일이 지나고 생활이 점차 안정이 되자 가옥을 지었는데 언제 지은 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1889년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새 재목으로 짓지 않은 듯하며 100년이 지난 1983년에 집을 완전히 헐고 새 재목으로 지은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모원당은 앞에서 잠깐 언급 한 바와 같이 만회당공이 중심이 되어 여러 종인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그리고 기와는 당시의 현감이 관아에 쓰고 남은 것을 보내주어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만회당은 휘가 경우(慶遇)이고 자는 태래(泰來)이며 만회당은 당호(堂號)이자 아호(雅號)이다. 1581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여헌선생을 쫓아 학문에 전념하였다. 여헌선생의 문인 가운데서도 학행이 출중하여 지금은 동락서원에 종향하여 향사를 받들고 있다. 모원당(慕遠堂)이란 당호는 여헌선생께서 명명하셨는데 거기에는 추원보본의 뜻이 담겨 있다. 그 부분을 『국역여헌집』에 실려 있는 모원당기에서 발췌해 본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고 부모를 낳은 이는 조부모이고 조부모를 낳은 이는 증조부모이니 미루어 올라가면 십대 백대 천대 만대로부터 저 옛날 원초에 인류를 낳은 조상에 이르러 다한다. 그렇다면 원초에 인류를 낳은 조상은 바로 우리의 이 몸이 처음 시작하여 생겨난 것이니 그 이하 백, 천, 만대가 쌓여 내려옴은 다만 그 신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오직 그 기맥은 백, 천, 만대를 내려오면서도 한 기맥을 전하였는데 형세가 미치지 못함이 있고 정이 다하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제사는 한계가 있고 효도는 미치기 어려우나 무궁한 이치와 무궁한 효성을 어찌 대가 쌓였다하여 혹 그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원당 건물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고택으로 경내에는 청천당과 묘우가 있다. 2000년 9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90호로 지정되었다. 당 앞에 있는 해묵은 회화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청천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그리고 당초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혹자는 말하기를 청천당 선생 생전에 지었다고도 하고 또 위치도 현재의 건물 자리에서 북서 방향으로 100m쯤 아래쪽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이 아니고 신빙할 만한 문헌적 자료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이 1800년 경신년 환란 때 관에서 철거해가서 보관했다가 1860년 신원한 뒤에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고 재목을 찾아 왔는데 찾아온 즉시 지었는지 얼마 있다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의 건물은 1902년에 지은 것이 확실하다. 지금 건물을 지을 때 중수 상량문을 유헌 선생이 썼는데 유헌 연보에 의하면 고종 39년(1902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천당은 훼철 전에는 5칸 집이었는데 관에서 뜯어가 60여년이나 보관하는 동안에 재목이 상하고 더러 잃어버리기도 해서 남은 재목으로 맞추어 짓다보니 지금과 같이 초라한 3칸 집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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