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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파의 상징, 동락서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20203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동락서원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5년(효종 6)에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애초에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였는데, 1610년 만회당공이 중심이 되어 동문제생이 협력하여 부지암정사를 창건하고 선생의 강도지소로 삼은 것이다.

이곳은 여헌 연보에 의하면 서진사의 옛 터라 했고 만회당 연보에 의하면 만회당 외가의 정기라 했다. 어쨌거나 모든 계획과 주선은 만회당이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선생의 연세가 57세이었으니까 오랜 햇수 동안 여기서 강학하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637년에 선생이 서거하시자 17년 뒤인 1654년에 부지암정사에다 묘우를 지어 서원 체제를 갖추었다.

1655년 위판을 봉안하고 부지암서원이라 개칭하였다. 1676년(숙종 2) 동락서원이라 사액되었다. 동락이란 동국(東國)의 이락(理洛) 이란 뜻인데 이락은 정주학을 상징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명도와 정이천은 낙양 사람이고 이수와 낙수 사이에서 강학을 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조정의 명령에 의해서 서원이 훼철되었다. 1932년 국내 사론에 의해서 묘우를 건립하여 위판과 영정을 봉안하였다. 1933년 만회당공을 종향하였다.1970년 7월에 국비 보조와 사림 부담으로 서원 복원에 착수하여 이듬해 3월 준공을 보게 되어 여헌만회당 두 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묘우는 경덕묘, 강당은 중정당, 동재는 윤회재, 서재는 근집재, 외삼문은 준도문이다. 준도문 바로 앞에 400여 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헌 선생께서 손수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강당 서쪽 처마와 연접하여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미수 허목 선생의 찬이고 글씨는 옥천 조선생이 썼다.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1호로 지정하였다.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 8월 말정에 올리고 있다.

부지암정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회당이 중심이 되어 선생의 강학을 목적으로 창건하였다가 선생이 서거하시자 서원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부지암정사는 당초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서원 복원 후 잇달아 건축하였는데 중창 기문은 후손 병규공이 썼다.

400년 전 창건 당시의 기문은 여헌 선생이 쓰셨는데 선생은 그 기문에서 부지(不知)의 뜻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 나에게 있어서 부지(不知)는 내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은 부지의 소득이고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은 부지의 실책이다. 둘째는 남에게 있어서 부지는, 내가 남이 알아줄 만한 실제 덕이 없어서 알아주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고 나에게 남이 알아줄 만한 실제의 덕이 있는데 알아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탓이니 개의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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