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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 할배와 인의방설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204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조선시대에는 어느 지역을 가거나지역 나름대로 공인된 양반가문들이 있었다. 지역마다 그 지역의 대표적 양반가문과 그들 가문의 서열을 말하여 주는 성씨 명단이 일종의 민간설화의 형태로 전해오고 있었다. 어떤 지역을 단위로 하여 그 지역 내의 양반가문을 품정하는 관습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무엇이 가문 품정의 기준이었던가. 대표적 양반가문을 선정할 때 그 선정기준이 되는 것 중에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인물이다. 한 가문의 양반으로서의 가격(家格)은 그 가문이 ‘누구’의 후손이며 또 그 ‘누구’의 후손 중에서 얼마만큼 훌륭한 인물이 얼마만큼 많이 배출되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품정하였다. 그 ‘누구’는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지역과 직접적인 인연을 가진 인물이어야 하였다. 즉 그 세거지 출신이거나 그곳에 맨 처음 입거한 이른바 입향조이거나 아니면 그 입향조의 가까운 직계선조이어야 하였다.

물론 그밖에도 그 가문이 혼인을 함에 있어 상대 가문을 얼마나 잘 택하였으며 ‘봉제사 접빈객’을 포함한 일상생활에 있어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얼마나 잘 지켰는가 하는 것들이 또한 기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역시 인물이다.

인동장씨 마을 사람들이 ‘여헌 할배’라고 부르는 장현광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외부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학자로서의 여헌 할배를 기억함은 물론이요. “신동지(池)를 여헌 선생이 축조했다”는 전설까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을 전하기도 한다. 여헌 선생의 생애를 통해 보면 종가를 지지하는 이른바 보종과 문중의 재흥을 위해 애쓴 바가 자세히 드러난다. 실전된 상계의 조상의 흔적을 찾는 일, 족계의 중흥을 꾀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상사와 관련된 활동을 실제로 펼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동장씨들은 여헌 선생이 언명한 계보를 그대로 따르며, 매사에 여헌 할배가 정한 바를 규준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제 여헌 할배가 생각한 인동장씨의 터전을 선생이 지은 ‘인의방설’을 통해 들어 보자. 수동(壽洞)은 옛날 현(縣)의 이름인데 지금은 인동부(仁同府)이다. 별호는 옥산(玉山)이니 곧 우리 장씨의 본적인 고향이다. 읍의 지형은 천성산(天城山)이 동쪽에 우뚝 솟아 진산(鎭山)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가지가 셋으로 갈라져 나왔다. 그 한 가지는 왼쪽으로 뻗어 와서 지세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기를 7리쯤 하여 고을의 동남쪽에 큰 봉우리가 되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남산(南山)이라고 칭하니 그 아래가 바로 지금의 인의방이다.

또 오른쪽의 한 가지는 또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여 고을의 동북쪽을 감싸고 호위하고 있는 바 북쪽으로부터 서쪽으로 8~9리를 뻗어가서 낙동강의 강가인 부지암(不知巖)에 이르러 멈추었으며, 중심의 한 가지는 부(府)의 뒤에 높이 뭉쳐 있는데 바로 이 고을의 주산(主山)이다. 주산 밑에 작은 한 맥이 혹 끊겼다가 혹 연결되었다가 하여 읍성(邑城)에 이르러 한 작은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른바 옥산이다. 이 어찌 옛 사람들이 특별히 이루어진 것을 기특하게 여겨 이 고을의 이름을 옥산이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성산의 동남쪽에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을 유악(流嶽)이라 하며, 유악이 이미 낮아졌다가 또다시 고을의 정남방 5~6리 지점에서 우뚝하게 일어난 것이 있는데 이것을 봉두암(鳳頭巖)이라 한다. 봉두암 서쪽으로부터 뻗어 고을의 서남쪽 5리 지점에 이르러 멈추니, 그 아래는 곧 양원(楊原)이다, 고을의 서쪽 들 10리 밖은 큰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의 오른쪽으로 또 10리쯤 되는 곳에는 유명한 금오산이 높이 솟아 대치하고 있다.

읍성의 연혁은 아득하여 상고해 알 길이 없으나 인동이라고 칭한 것은 또한 우리 종가가 처음 터를 잡은 뒤의 일일 것이다. 우리 장씨의 종가는 옥산의 아래 백여 보(步) 쯤 되는 곳에 있는데, 동·서·남·북이 모두 큰길이기 때문에 이 터를 옥두형(玉斗形)이라 한다. 이는 정방에 북두성(北斗星)을 가리키고 있고 산 이름을 옥산이라 하기 때문에 또한 옥두라고 칭한 것이다.

우리 선대로서 미쳐 알 수 있는 분은 미천한 내게 20대조가 되니, 곧 삼중대광신호위삼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인 휘 금용(金用)이신 바, 이제 종손 중에 제일 어린 자가 24대손이 된다. 임진년(1592년) 왜구가 쳐들어올 때에 이 고을은 적병이 곧장 쳐들어오는 길이 되어서 고을 안의 공청(公廳)과 사가(私家)가 모두 적들의 화마에 불타 없어졌는데, 지금은 22대 종손 진사 경우(慶遇)가 그 터를 넓혀 쌓아 집을 지었다.

나로 말하면 우리 5대조인 사천병마절제사부군(泗川兵馬節制使府君) 우(俁)께서 6대조의 둘째 아드님으로 처음 남산의 밑에 터를 잡아 남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양원의 뒷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으니, 그밖에 마주 보이는 산은 금오산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이 곳은 동쪽을 주로 하고 서쪽을 향했기 때문에 이름을 인의방(仁義坊)이라 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옛날의 인선(仁善)이었는데 지금은 선(善) 자를 의(義) 자로 바꿨으니 종가와 2, 3리쯤 되는 거리에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 마을의 늙은이들을 뵈올 때면 집 앞의 밭두둑을 가리키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고택의 외대문(外大門)이 있었던 곳이다.” 하였고 옆에 넓고도 큰 푸른 돌 하나가 있었는데 흙 속에 묻힌 채 한두 귀퉁이가 드러나 있었고 맷돌과 같이 매끄럽고 윤택하였는바, 말씀하기를 “이 돌의 이름은 바로 장명석(長命石)이다.”하였다. 또 아무 곳을 가리키며, 채전(菜田)이 있었던 곳이라 하고, 아무 곳은 별실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으며, 담장 둘레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였다고 하였는바, 지금도 오히려 기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옛날 선조들이 지팡이를 짚고 신 신고 조용히 거니신 곳이며 수레와 말이 출입한 곳임을 알 수가 있으니, 어찌 길이 사모하여 감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조(高祖)로부터 조고(祖考)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3대가 이 옛집을 비워두고 모두 백 년 동안 성산(星山)의 외지에서 지냈는데, 당시 이곳에 편안히 거처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있어 반드시 성산의 집에 거주하셨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나의 선고(先考) 중년에 비로소 이 마을로 돌아와 옛집을 허물어 새 집을 짓고 살았는데 또 불행하게 심한 난리를 만나 남김없이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피난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왜구가 물러간 뒤에 돌아와 보니 쑥과 갈대가 터를 온통 뒤덮어 몸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다행히 난리에 외롭게 남아 먼저 돌아온 문족과 향인들이 서로 거처할 곳을 얽어 만들어 주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지금 노쇠함이 이미 심하니, 이 뒤에 얼마나 더 살겠는가. 또 생각하건대 이 고을은 본도(本道) 가운데 이미 적병의 직통로가 되어 화를 받음이 가장 혹독한데, 지금 급한 시세가 아직 영원히 안정된 형국이 아니니, 앞으로 화의 기미가 반드시 종식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옛집에 편안히 살 것을 정하기 어려우니 몇 년 전에 이미 계아(繼兒)로 하여금 다시 성산의 집을 경영하게 하고 일선으로 시집간 한 딸이 수시로 내왕하고 있으나 미처 이곳에는 전장(田庄)을 두지 못하였다.

이제 나는 장구히 전하여 이어가서 마을 이름의 뜻을 지킬 것을 생각함이 어찌 깊고 또 원대하지 않겠는가. 우리 장씨가 이 지방에 거주한 지가 이미 20여대 대를 지나 그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또 이 뒤에 머물러 전하기를 몇 대를 하여 몇 년을 지낼지 어찌 알겠는가. 억만 년 우리 동방에 어찌 편안할 때가 없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남의 후예가 된 자로서 옛 터전을 보전하여 지키고 유적을 잘 받들어 길이 사모할 곳으로 삼는 자가 몇 집이나 되겠는가. 선조의 입때가 묻은 기물과 손때가 묻은 물건도 오히려 공경히 받들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는데 대대로 생장한 고향과 거주한 마을에 있어서이겠는가. 진실로 장구히 전할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니, 일시에 가장이 된 자들이 은혜와 사랑을 자녀에게 두루 미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리하여 반드시 가산을 조각조각 분할하여 집터를 집안 식구와 자녀들 숫자에 따라 나누어주어 각기 각자의 물건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물려받은 후손들이 혹 세대가 소원하기도 전에 이미 친목하지 못하여 이산되고, 혹 쇠락하고 고단하여 옛터를 지키지 못하며 혹은 술가의 속이는 말에 따라 이사하기도 하니, 이것이 모두 옛날 살던 곳을 오래 지키지 못하는 방도이다.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 때에 혹 집터를 교환하기도 하고 혹 팔기도 하여 마침내 선조가 물려주신 땅이 하루아침에 타인의 소유가 됨을 면치 못하면 선대의 은택이 혹 끊기기도 전에 후예의 정이 이미 절로 끊기고 만다. 이에 전원을 달리 세우고 분묘가 황폐해져서 선대의 옛 자취가 모조리 없어져 다시 찾아 물을 곳이 없게 되니, 만일 기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마음에 안심하고 뼈에 사무치지 않겠는가.

세상에 진실로 고향을 떠나 부귀해진 자가 있으나, 여우가 죽을 때에는 자기가 살던 곳을 향하는 의리가 있으니, 금수도 그러한데 하물며 이 영특하고 귀한 사람에 있어서랴. 그렇다면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지 못하여 옛 땅이 타인의 소유가 되는 까닭은 선대의 가산을 모두 각자의 물건으로 만들어 제멋대로 팔아넘기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나의 우활한 계책은 비록 일시적으로 분가하여 따로 거처한다 하더라도 동기간에 함께 거주하고 함께 생활하여 백세토록 변함이 없이 보존하는 것이 어찌 사랑하는 부모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로 세속의 준례를 따라 조각조각 분할하여 마침내 각자의 물건을 삼게 한다면 옳지 않으니 어찌 제멋대로 팔아 타인에게 돌아가게 하는 병폐가 없겠는가.

오직 떳떳함을 지키고 함께 살 수 있으면 백세를 함께 살고, 혹 이사하고자 하면 비워놓고 떠나가서 타인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할 경우 지금은 비록 이사를 가더라도 뒤에 혹 돌아오고자 하면 그 형세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함께 나의 후손이 된 자들은 내외손을 구분하지 말고 촌수의 원근을 따지지 말고 곧 와서 나의 땅을 지켜 살던 곳을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의 사천부군(泗川府君)의 옷과 관을 묻은 곳이 이 산 너머 언덕에 있으며 나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봉분이 실로 그 묘역을 함께 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로 나의 후예들이 이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니 내가 후예들에게 크게 바라는 바이다.

마을 이름이 옛날에는 인선이었는데 내가 이제 의(義) 자를 가지고 선(善) 자를 대신하였는바, 그 내용은 마을 이름의 본편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 인의(仁義)라는 두 글자는 바로 우리 인간의 온전한 도이니, 마을 이름을 돌아보고 그대로 실천하여 마음에 두고 몸에 행하는 사이에 잃지 않는다면 바야흐로 온갖 복을 오게 하는 터전이 될 것이요, 또한 이 늙은이의 소원이 마땅히 무궁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헌 장현광 선생의 인동에 관한 글이다. 인동에 대해서는 『옥산지』 외에는 이렇다 할 자료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주로 인동에 자리 잡은 인동장씨 남산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인동의 지형지세, 인의동이란 동명의 내력, 세거지에 대한 애정 등이 넉넉하여 사람들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에 대한 선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선조의 입때가 묻은 기물과 손때가 묻은 물건도 오히려 공경히 받들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는데 대대로 생장한 고향과 거주한 마을에 있어서이겠는가. 진실로 장구히 전할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란의 상처 속에서 종족의 결속을 다지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켜 그 후손에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절절히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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