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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 열의 후손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301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집성마을 사람들은 타성들과 위세 경쟁을 하지만 같은 성씨 내에서도 파문중 그리고 마을 간에 위세 경쟁을 한다. 신동 사람들은 인동 일대에 자리 잡은 인동장씨 집성마을의 위세 순위에 다음과 같이 자랑한다. ‘일 신동, 이 남산, 삼 오태, 사 각산, 오 대실’이라고 한다. 인근의 인동장씨 집성마을 가운데 신동이 가장 명성이 높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 연유를 물어보면 ‘신동에서 과환(과거급제와 벼슬)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올[신곡]은 판서공[휘 烈]과 승지공[휘 熙]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는데 주로 ‘안마’와 ‘거리마’에 거주하였고, 승지공의 후손은 ‘새마’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판서공 열(烈)의 후손들 중에서 판서공의 6대 주손 지덕(趾德)은 호가 사이당(四而堂)인데 음직으로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 翊贊)을 제수 받았다. 만년에 새올 천생산 아래에 별장을 짓고 우거하다가 3대 만에 맏이[휘 胤宗]는 남산 종택으로 돌아가고 지차(之次) 여러 집은 그대로 눌러 앉아 살았다. 사이당공의 아들 수륜(壽崙)은 음직으로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고, 78세의 수를 누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사이당공의 맏손자 윤종(胤宗)은 음직으로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政)을 지냈고, 7대 주손 지영(志永)은 영릉 령(寧陵 令)을 제수 받았다. 돈녕부는 왕실의 친척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관청이고 영릉은 조선 효종의 능이다.

사이당공의 5대손 인원(仁遠)은 기해년(1839)에 문과에 급제하여 보령현감 춘천부사 동부승지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둘째 아들 원상(原相)은 갑자년(1864)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사이당공의 5대손 진원(晋遠)은 신유년(1861)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4년만에 서거하였기 때문에 종9품인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머물고 말았다. 사이당공의 현손 석우(錫愚)는 호가 신재(新齋)인데 계유년(18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목천현감을 지냈다. 이 어른은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문집 필사본 7권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비장되어 있다. 신재공의 아들 복원(福遠)은 신유년(1861)에 일천으로 장릉 참봉이 되었다가 정읍현감을 역임하였다. 사이당공의 증손 시복(時復)은 기유년(178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일천(逸薦)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배수(拜受)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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