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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지 수리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C030202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삼문

수리시설인 신동지(사각지)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수리계는 비공식적 조직이지만 신동지에 의탁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 가입되어 있다.

신동지는 못둑마에 있는데 조성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장씨들이 들어온 이후 이들의 주도로 생겨났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은 현재도 신동지의 소유가 신동 마을로 되어 있으며, 1970년대 농지개량조합(지금의 농업기반공사)의 소유로 전환되는 것을 마을에서 반대하여 지금까지 신동지의 소유와 관리는 마을로 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미와 칠곡 일대에서도 지금까지 마을 소유의 저수지는 신동지가 유일하다는 마을 주민들의 말에 저수지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신동지의 형태는 1960년대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65년 전까지 지금 면적의 1/3 정도였으나 칠곡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중장비의 도움으로 현재의 직사각형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전만 해도 저수지의 면적이 작아 물 부족으로 인해 농사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때의 확장으로 인해 논에 물을 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또한 저수지에서 논으로 물을 대는 것에 대한 변화도 보인다. 1973년 경지정리 전까지 저수지에서 각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은 저수지의 수문에서 가장 가까운 논으로 물이 들어가면 아랫논으로 물이 내려가기 위해 물꼬를 내던지 논에 물이 차서 아랫논으로 넘어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저수지에 멀리 떨어지는 논일수록 가뭄이 들어 저수지에 물이 부족한 해는 농사를 못 짓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경지정리 이후 논을 따라 시멘트 수로를 만들어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못 짓는 경우는 사라졌다.

2007년 현재 신동지를 의지해 농사를 짓는 몽리답(夢利畓 : 저수지나 보 등의 수리시설에 의하여 물이 들어와 농사를 짓는 토지)은 약 700여마지기 정도이며 평수로 14만평이다. 현재 수리계에 가입되어 있는 인원은 80여명 이상이며 정확한 인원은 알 수 없다. 계원의 대부분이 신동 주민이었으나 15년 전부터 주변지역이 개발되면서 토지의 소유가 외지인에게 많이 넘어가면서 수리계 계원의 외지인이 증가하였다.

수리계를 운영하는 임원은 계장(예전에는 ‘도감’이라 불렸다)과 저수지를 관리하고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분수(分水, 예전에는 ‘강구’ 또는 ‘못강구’라 불렸다) 각 1명이 저수지를 관리한다. 계장과 분수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매년 계추 때 새로 선정하거나 연임하며, 수고비로 1년에 계장 20만원, 분수 200만원의 돈을 받고 있다. 2007년 현재 계장은 장석우(남, 67세), 분수는 남기수(남, 66세)씨가 하고 있다.

수리계의 정기모임은 계추라 하여 양력 12월 또는 1월에 날을 정하여 계원이 모인다. 계추 때 ‘수곡’ 또는 ‘수세’라 하여 일종의 저수지 사용료를 받는데 마지기당 나락 5~6근 정도를 받는다.

분수를 맡은 사람이 연중 가장 바쁠 때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하는 음력 5월부터이다. 5월 초 첫물을 뺄 때는 분수가 수문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첫물을 빼는 날 아침 일찍 분수가 수문을 열어 놓은 채 건어물, 소주를 차려놓고 1년 농사가 잘 되라는 말을 하며 고사를 지낸다. 이것으로 나락농사의 가장 중요하며, 바쁜 시기가 찾아온다.

안타까운 점은 수리계의 운영과 관련된 문서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 문서에는 윗대 어른들이 관리하던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한 수리계의 관리 내용이 적혀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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