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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주의 기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D020102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신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진

집단이주 당시 이주민들이 받은 보상금은 대지 한 평에 1000원, 논 1평에 200원, 밭 1평에 120원, 임야 평당 10원, 사과나무 20년생 기준으로 한 그루 500원, 뽕나무 7~8년생 기준 한 그루 5원이었다. 이러한 보상가의 문제는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같은 가격으로 그러한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이주단지로 이주할 당시, 대지가가 위치가 좋은 전반부는 2400원, 중앙부는 2000원, 후반부는 1700원에 분양되었다. 논밭은 보상가의 평균 5배 이상 가격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대지가 2000원내외, 논이 1200원, 밭이 1000원 내외에 거래되었다. 이주단지와 공단조성이 되면서 갑자기 주변의 지가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자유이주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시나 연고지를 찾아 떠났지만 집단이주민들은 이주단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재정착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또한 비자발적 이주민의 적응에 장애가 되는 문제였다. 당장 이주를 해야 되는데 이주단지가 표토만 정지되었을 뿐, 상하수도와 도로망 등 토대가 전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주민들은 관계당국에서 주어진 국민주택형 설계도면에 따라 주택을 자발적으로 건축하여야만 했다. 콘크리트와 기와 등 건축자재를 손수 구입하고, 공용시설인 도로와 상하수관을 주민들이 협력하여 개설해야만 했다. 기술적으로 힘든 일은 기술자를 물색하여 투입해야 했다.

이 와중에 소위 막노동을 하는 근로자들이 술을 먹고 싸움을 벌여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현장도 목격해야 했다. 공동체를 일구어 농사만 짓던 이주민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동장을 맡아 이주단지를 추진했던 유종만(86, 남) 씨의 말대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이주가 아니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만 것이다.

당국의 일방적 결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이주단지로 이주한 결과, 현재 이주단지는 구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되고 이주민들이 원했던 지역은 가장 번창한 도심지가 되는 바람에 현재까지도 정부당국을 원망하는 요인을 제공하고 말았다.‘우리는 구미공단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라요’라고 할 정도로 이주민들은 우리나라 초기 근대화 과정의 모순과 진통을 한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다.

공단건설을 반기는 다른 한편에서는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좌절을 맛보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생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데모를 하고 공권력 앞에서 상실감을 맛본 이주민들의 아픈 상처가 근대화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평온한 농촌에서 오순도순 모듬살이를 해 온 순진한 농민들이 뜻하지 않은 강제이주를 맞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사건까지도 경험했던 사실을 근대화의 수혜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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