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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켜 온 농민, 박춘근 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D0301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신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진

“옛날에 객지로 나갈 생각도 했지만 객지 나가면 집도 흔들리잖아요. 그래서 평생을 고향에서 봉사했죠 뭐.”

박춘근 옹은 2007년 현재 망향보존회 회장과 신평2동 영농회 회장, 신평2동 번영회 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옛 고향 신부동에서 새로운 터전 신평동으로 옮겨 온 이주 1세대이다. 그는 새 터전으로 옮겨와 고향삼은 신평동에서 농민으로 살아 온 자신의 삶을 남은 여생도 이곳에서 농민으로 살고 싶은 소망을 담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는 선산군 구미면 신부동 340번지에서 육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지금은 바뀌어서 255번지가 되었다. 그의 동생들은 모두 구미에 살지만 신평동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박춘근 옹은 “내만 여개 죽 살았지. 고향 지키기가 힘들어요.”라고 말한다.

박춘근 옹은 구미중학교를 16살에 졸업하고, 부모 생계를 이어 받아 농사일을 시작했다. 졸업하던 즈음에 4-H 붐이 일어나 회장 일도 도맡아 했다. 4-H는 협력을 강조하며 새마을운동을 하는 일종의 협업단체였는데, 동네에 새마을운동을 하는 어른단체가 있고 4-H는 청소년 원천단체의 성격이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4-H는 새마을운동을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묶기 위한 단체로, 청소도 같이 하고 풀베기며, 논농사 작업도 함께 하면서 협동심을 기르는 기회가 되었다. 그 당시 협동과 협업으로 수입금이 좀 생기면 계를 해서 자체적으로 기금을 모았다. 돈이 귀했던 그 시절, 다른 사람들을 주는 것보다 같은 값이면 동네 청년들에게 일을 주자고 해서 공동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받아서 계금을 모았다고 한다.

21살이 되던 해에 군입대를 했다. 3년간 육군으로 복무하고 병장으로 제대했다. 예비군 소대장을 제대하고 한 3년 있다가 시작해서 수십 년을 했다. 직업은 아니지만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했다고 한다. 제대 후 결혼하기 전까지도 농사를 계속 지었다.

박춘근 옹은 지금도 누가 직업이 무엇이냐 물으면 농업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옛날에 다른 직업 가질 기회는 많았지. 나는 맏이 아니요. 가정이 될라카마 동생들이 다 객지로 나가는데 맏이는 나가면 안 돼. 형님이 집을 지키는 것이 의무야. 형님이 객지에 나가서 출세하고 동생들이 못하면 싸움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동생들이 형님이 뭐 했노카면서 아버지한테 고향땅 반은 내 놓아라하고 재산싸움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요. 공부시키고 좋은 직장 가지고 있어도 형님이 고향 지키지 않으면 고향땅 내놔라 많이 캐요. 그 당시에는 공부만 시켜주면 끝난다고 캐 놓고도 나중에는 딴 소리해요. 우리 집은 가정은 그리 휼륭하지는 않지만 그런 거는 없어요. 내가 가정을 지키고 동생들이 밖에 나가서 공부하고 직장이 있으니까.”라고 했다.

그는 29살에 신식 결혼을 했다. 결혼할 당시 취직을 해 볼까도 생각했었다. 처갓집이 의성인데 협성방직을 운영하는 집안과도 가까와서 거기서도 이야기가 있었고, 서울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신평동으로 이주해 와서도 다른 데 이사 간 사람도 있지만 그는 ‘이대로 지킨다’‘보상 받은 돈 안 까먹고 집 한 칸이라도 지어서 여기서 지킨다, 하나라도 지켜야 된다’는 생각하고 떠날 생각은 안했다고 한다. 공단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도 이주단지로 온다고 생각했지 다른 곳에 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4-H도 하고 예비군 소대장하면서 다른 데 가서 교육을 많이 받아 본 경험으로 보면 사람 사는 게 똑같고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감나무 묘목과 논농사를 하고 있다. 전체 농지가 약 2,000평 정도이다. 거의 논농사는 자가소비용 식량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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