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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84
한자 郭再祐
영어음역 Gwak Jaeu
이칭/별칭 계수(季綬),망우당(忘憂堂),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의병장
출신지 경상남도 의령
성별
생년 1552년연표보기
몰년 1617년연표보기
본관 현풍
대표관직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정의]

임란 때 구미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

[개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금오산성천생산성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이고, 부인의 외할아버지는 조식(曺植)이며, 동서는 동강 김우옹(金宇顒)이다.

[활동사항]

곽재우는 1585년(선조 18) 별시에 정시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무효가 되었다. 그 후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의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조방장을 겸하였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얼마 후에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이라는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었으며,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1604년(선조 37) 찰리사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곧 이어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같은 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1월에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으며, 1608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1617년(광해군 9)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망우당집(忘憂堂)』이 있다.

[묘소]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조정에서 곽재우의 사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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