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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165
한자 宋希奎
영어음역 Song Huigyu
이칭/별칭 천장(天章),야계산옹(倻溪散翁),충숙(忠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성별
생년 1494년연표보기
몰년 1558년연표보기
본관 야로
대표관직 집의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지역에 정착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야로(冶爐). 자(字)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산옹(倻溪散翁). 송수겸(宋守謙)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송소(宋紹), 아버지는 부사직 송방현(宋邦賢)이며, 어머니는 황진(黃珍)의 딸이다. 장인은 선산 사람 증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이다.

[활동사항]

송희규는 1513년(중종 8)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허백기(許伯琦), 김취정(金就精)과 함께 등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현풍현감·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1534년 흥해군수가 되었다. 이 때 옥산(玉山)에 있는 이언적(李彦迪)과 왕래하면서 교분을 두텁게 하였으며 선정관(善政官)으로 뽑혀 1급이 승진되었다.

이후 사헌부장령·상주목사·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고,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윤임(尹任)을 옹호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545년(인종 1) 대구도호부사로 복직하였고, 이듬해 예빈시정이 되었으며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7년 장령으로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와 고산(高山, 전라북도 완주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지명)에 집을 짓고 스스로 ‘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이름하였다. 후에 처가가 있는 선산에 우거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야계문집(倻溪文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을 사람이 송희규의 효의(孝義)에 경복하였으며 1562년(명종 17)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효우비를 세워 주었으며 1565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현재 성주 천곡서원(泉谷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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