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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22
한자 許蔿
영어음역 Heo Wi
이칭/별칭 왕산(旺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55년연표보기
몰년 1908년연표보기
본관 김해
대표관직 13도 창의군 군사장

[정의]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허위(許蔿)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왕조 말기로,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과 그에 따른 을사의병(乙巳義兵), 1907년 해이그밀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국가로서의 주권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었다. 허위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내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 뜻은 여러 형제와 아들들에게 이어졌고, 아들들은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만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 1855년(철종 6)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이고, 형으로 방산(舫山) 허훈(許薰)이 있다.

[활동사항]

허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경학보다는 병서를 즐겨 읽었다. 특히 큰형인 허훈에게 많은 지도를 받았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김산(金山: 지금의 김천) 장날을 기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봉기하여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곤경에 빠지자 피신하였다가 영호남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아 충청도 진천까지 진격하던 중 신기선(申箕善)이 갖고 온 고종의 의병 해산 비밀 봉서(封書)를 받고 헤어졌다.

이때 큰형 허훈이 은거하는 청송 진보에 가서 3년간 지도를 받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신기선의 천거로 45세에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으로 시작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비서원승(秘書院丞) 등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허위는 성격이 엄격하여 평리원판사로 있을 때 사리에 맞지 않으면 이미 판결이 난 것이고 세도가가 관련되었더라도 번복시켰다. 또한 계속 배일(排日) 격문을 배포하여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참찬 직을 사임하며 석방되었다. 2개월 뒤 고종의 배려로 비서원승에 임명되었으나 계속해서 격문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하자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구금되었다.

방면된 뒤 전라도·충청도·경상도의 접경지인 삼도봉 아래에 은거하여 의병 규합에 전념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을 대표하고 외교 업무를 통감부가 장악하였다. 그 결과 민족의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료들은 정부에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장지연은 신문 사설을 통해 비분을 전하였고, 백성들은 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때 허위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경기도 등지를 돌며 유생들과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자 허위는 경기도에서 창의하여 포천·양주·철원·장단·연천을 누비면서 의병을 이끌었고, 그때 해산당한 강화진의 병졸까지 흡수하였다. 중형(仲兄)인 허겸은 연천 등지에서 400여 명의 의병을, 연기홍(延驥洪)은 고양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이홍응(李洪應)은 영평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연기우(延基羽)와 김호규(金鎬圭)는 각각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허위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1907년 겨울 국내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에 모였는데 군사가 1만 명이었다. 이 때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허위는 13도군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08년에 허위는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하여 각 도의 의병들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수택리에 집결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이끌고 도착하였으나 다른 도의 의병들이 교통 불편으로 도착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선수를 쳐 l월 25일 공격을 해왔다. 필사의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사상자만 나올 뿐이라 할 수 없이 양주로 후퇴하였다. 그때 총리대신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 관찰사 혹은 내부대신 자리를 주겠다며 허위를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하고 심히 꾸짖었다.

허위는 적성 동남쪽 감악산에 의병 훈련장을 만들고 화약을 구하기 위해 김창식(金昌植) 등을 서울로 파견하고 경현수(慶賢洙)에게 밀서를 주어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요청하기도 하고 고종 황제 복위, 외교권 반환, 통감부 폐지 등 30개 항목을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기도 하면서 재차 서울 공격을 서두르던 중, 6월 11일 철원의 일본 헌병분대장 오타 기요마츠[太田淸松] 대위가 거느린 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허위는 헌병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에게 “나의 행동이 비단 조선을 위해서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며 조선이 독립되어야 동양 평화가 유지된다”고 하였다. 허위의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함께 유명하다. 또한 심문하던 아카시 겐지로가 허위의 깊은 한학과 이학에 감동되어 국사(國士)라 존칭했다.

교수형을 언도받고 형장에 섰을 때 일본 승려가 와서 명복을 빈다고 불경을 염하자 “충의 넋은 천당에 가게 되어 있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원수놈의 손을 빌어 천당 가기를 바라겠느냐”며 큰 소리로 내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가 1908년 10월 23일이고 향년 52세였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숙부 허겸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항일에 몸바쳤다.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 ‘그 권속들은 모두 국외로 이주하고 그 자손들은 불령운동(不逞運動)에 종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허위가 열살 전에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군사처럼 따르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라는 문구를 만들었으니 대장군의 기질을 타고났다 하겠다. 교수형(絞首刑)의 언도를 받고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 아버지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상훈과 추모]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허위에 대해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과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라고 추모하였다. 1962년 3월 l일 건국공로훈장이 서훈되었다.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번지 달성공원 내에 순국기념비가 있고, 금오산에 유허비가 있다. 또한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의 길을 왕산로(旺山路)라 명명하여 허위를 기리고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에서는 왕산허위선생기념사업회(회장 노진환)를 결성하여 기념관 건립, 생가 성역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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