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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의병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44
한자 許蔿義兵抗爭
영어의미역 The Righteous Army Resistance of Huh Wi
이칭/별칭 허위의 의병투쟁,허위의 구국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896년 3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8년 6월 1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1896년 경상북도 김산(김천)|1907년 경기도 연천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김산의진|창의원수부|13도창의군

[정의]

조선 말기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허위의 구국 의병투쟁.

[역사적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선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두발과 복장의 형태마저 강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다.

일찍부터 일본과 서양을 금수(禽獸)로 여겼던 선비들은 단발령과 변복령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라 하여 적극 배척하였다. 오랑캐의 침투를 막아서 유교 질서를 지키려는 정신은 유교 학문의 맥이 깊은 곳일수록 강하였던 것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등은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다.

[목적]

1895년 전기의병 때 허위는 적을 토벌하여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겠다는 ‘토적복수(討賊復讐)’와 문명을 지키고 야만을 몰아내겠다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기치를 들었고, 1907년 후기의병 때는 일본 통감부를 몰아내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권을 되찾겠다는 ‘국권회복(國權恢復)’의 기치를 들었다.

[발단]

1895년 전기의병에서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허위 등이 선산(善山), 상주(尙州), 김천(金泉) 등지의 선비들과 연합하여 항쟁에 나섰다. 그리고 1907년 후기의병에서는 고종(高宗)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강제 체결되고, 또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국가의 존망(存亡)이 시각을 다툴 때, 고종의 ‘거의(擧義)’라는 밀지(密旨)를 받들고 항쟁에 나섰다.

[경과]

허위의 의병항쟁 중 전기의병은 1896년 3월 10일 김산(金山, 지금의 김천) 장날을 기회로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여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으로 삼고 김산군(金山郡) 무기고를 점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의병부대의 이름을 김산의진(金山義陣)이라 하였고, 이기찬(李起燦)이 대장에, 허위 자신은 참모장에 올랐다. 김산의진은 의진(義陣)을 김산과 성주(星州)에 나누어 벌려 놓고, 대구부 공격을 목적으로 각 고을에 격문을 발송하고 더 많은 의병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정보를 알아낸 대구부 진위대(鎭衛隊)의 선제공격으로 성주의진이 먼저 패배하여 흩어졌고, 이어서 서울과 공주관군까지 합세한 관군의 공습을 받아 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등이 체포되고 김산의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김산의진이 아직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군의 급습을 받았던 것이다.

3월 25일 상주, 김산의 지사들과 직지사에서 재기하여 황간(黃間)을 거쳐 4월 3일 다시 지례(智禮)로 들어갔다. 이때 병사 규모는 포군(砲軍) 100여 명, 유생 70~80명 정도였다. 그 후 다시 북상을 강행하던 중 충청도 진천(鎭川)에서 국왕 측근 전경운(田慶雲)의 의병 해산 ‘조칙(詔勅)’을 받들고 의병을 해산시켰다. 그는 청송의 큰형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집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1889년 3월 원구단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추원의관, 평리원판사 및 수반판사,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 비서원승에 이르기까지 약 6년간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때 그는 여러 차례 올린 상소문을 통해 자강혁신(自强革新)을 도모하는 한편,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과 또 매국 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구국운동을 다각적으로 추진하였다.

결국 그는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뿌렸다는 이유로 일본군 헌병대에 4개월 동안 붙잡혀 있다가 1905년 7월에야 풀려났다. 정계에서 은퇴한 그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대를 두루 돌면서 의사들을 규합하였다. 남으로는 곽종석(郭鍾錫), 북으로는 상해의 현상건(玄尙建)·이학균(李學均)과 연락하였으며, 서로는 유인석(柳麟錫)과도 통하였다. 영천의 산남의진(山南義陣) 정환직(鄭煥直)에게는 군자금 2만 냥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정계에서 물러나서는 유생들과 연락하며 정세를 관망하던 중 고종의 ‘거의(擧義)’라는 밀지를 받들고 다시 항쟁에 나서게 되었다. 1907년 8월 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의병 부대와 통하면서, 경기도 지방에서 약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다시 일어났다.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의 해산병을 규합하고, 군인 출신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起羽) 등의 의병부대와도 연합하여, 연천·포천(抱川)·적성(績城)·삭녕(朔寧) 등지에서 일본군 및 일본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해산군인 및 군인 출신의 의병부대와의 연합은 허위부대의 실질적 전투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허위는 경기도 연천을 본거지로 진세를 강화하고 투쟁하였다. 또 그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음해와 협박 속에서도 전국의 의진 연합을 구상하여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를 조직하여,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軍師將)이 되어 각도의 대장을 지휘하였다.

이때 그는 각국 공사관에 통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대하여 열강은 국제법상 교전단체임을 인정할 것과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는 성원을 아끼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허위는 예하 정예병 300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당도하였으나, 약속된 후속부대가 뒤따르지 않은데다가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여기서 격전을 치렀으나 김규식·연기우 등이 체포되는 등 의진에 큰 손실을 입었다. 당시 양주에 머무르던 총대장 이인영이 1908년 1월 28일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문경(聞慶)으로 돌아감에 따라 군사장인 허위가 뒷일을 감당하였으나 서울진격작전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허위는 다시 임진강 유역으로 부대를 옮기고 그곳에서 활약하던 강원도의 조인환(曺仁煥), 적성(績城)의 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黙)·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民)·김응두(金應斗)·이은찬(李殷贊) 등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약 5,000명의 위세로 지속적인 항쟁을 계획하고 임진강 유역의 연합부대를 창설하여 자신이 총대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허위는 엄격한 군율을 시행하고 단결을 강조하면서 의병진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임진강 유역 일대에는 의병에 의한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그들이 필요한 모든 물자는 군표(軍票)로 조달하였다. 그리고 군량 확보를 위해 지방인의 납세와 미곡의 반출을 금지시키고, 의병들의 군사훈련과 무기 제조를 통하여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1908년 2월에는 경기도 가평(加平)의 의병 4,000~5,000명이 군사훈련을 하면서, 군수품을 만들면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다시 4월에는 13도에 창의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동참을 촉구하였고, 이어서 박사(博士) 경현수(慶賢秀)로 하여금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밀서를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휘하의 박노천(朴魯天)과 이기학(李基學)에게 태황제 복위, 외교권 반환, 통감부 철거 등 30여 개조에 달하는 국권회복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케 하였다.

허위의 활약이 강성해지자 이완용은 연천에 사람을 보내어 경상남도관찰사 또는 내무대신의 자리를 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허위는 이를 꾸짖고 물리쳤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서면(西面) 유동(柳洞)에 사는 박치연(朴致淵)이라는 농부의 집에 잠시 유숙하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1908년 6월 11일 체포되고 말았다.

[결과]

허위는 1896년 3월부터 1908년 6월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구속될 때까지 전후 12년 동안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 전기의병 때는 김산의진으로 일어났으나 전열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채 무너졌고, 재기하여서는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곧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후기의병 때는 경기도 연천을 근거지로 일어나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의병부대 간의 상호협조 부족과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허위는 임진강 유역에서 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총대장에 올라 서울 탈환작전을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게 붙잡힘으로써 통감부의 지배 아래 있는 서울을 탈환하고, 원수 일본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던 그의 원대한 포부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의 숭고한 뜻은 후에 그의 부하 장령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갔다.

[의의와 평가]

허위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전시기의 의병항쟁에서 의병장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을사늑약이 강제되던 무렵에는 정부의 고급 관료로서 자강혁신론(自强革新論)과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라는 탁월한 식견(識見)을 내놓았다. 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과의 직접적인 외교적 담판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허위의 이와 같은 남다른 행보는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고 있다.

허위의 의병항쟁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허위는 유생 출신 의병장으로서 전기의병 때부터 후기의병 때까지 격렬하게 항쟁하였으며, 명성 또한 높았다. 둘째, 허위는 전기 때는 고종의 ‘조칙(詔勅)’을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고, 후기 때는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의병을 일으켰다. 셋째, 허위는 후기의병 때 전국의병연합부대를 조직하여 대일전쟁(對日戰爭)을 수행하였다.

넷째, 허위는 유생 출신 의병장이었지만 자강혁신론과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던 만큼 그의 사상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었다. 다섯째, 또 그는 국권회복의 수단으로서 의병항쟁뿐 아니라 외교론적 방안도 동시에 강구하였다. 여섯째, 그가 순국한 후에도 그의 포부는 부하 장령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창의원수부 총대장 권중설(權重卨), 영평 방면의 진동대장 이홍응(李洪應), 황해도의 연기우(延起羽), 장단 방면의 김수민(金秀民) 등이 그러하다.

일곱째, 허위는 일본군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감이었던 아카시[明石元二郞]가 통감에게 그의 구명청원서(救命請願書)를 요청할 만큼 인격과 경륜과 식견이 탁월했던 인물이었다. 비단 그가 애당초에 의도한 국권수호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동아시아 안보논리나 구국항쟁의 논리는 매우 탁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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