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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임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89
한자 李任用
영어음역 Yi Imyong
이칭/별칭 종식(鍾植),월호(月湖)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괴평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괴평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1년연표보기
몰년 1975년(선산읍 습례리)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경력 혜성단 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임용의 자는 종식(鍾植), 호는 월호(月湖)이다. 아버지는 이희원(李希元)이다.

[활동사항]

이임용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칠곡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대구 동산병원으로 직장을 옮겨 4년간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김수길·이영식·이영옥·김삼도 등과 함께 시장 상인들이 폐점철시(閉店撤市)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 수백 매를 배포하여 적극적인 협력을 호소하였다.

만세 시위 후에는 대구경찰서장 백정의삼랑(白井義三郞)에게 만세 운동을 한 동포의 석방에 불응하면 암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우송하고, 일본 중추원 참의원이며 친일파인 박정양에게 “우리의 뜻에 응하지 않을 때는 암살하겠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또 조직적인 항일 운동을 펴기 위해 최재화(崔載華), 이영옥, 이명근, 이덕생 등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고 다수의 청년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받게 하고 군자금 모집에 전력하는 한편 한인 관리의 자진 사퇴와 경고문을 배포하였다.

독립운동에 반대하는 한국인 거물과 일본인 고관의 암살을 기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심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인 1930년 1월 부산방직공장 노동자 수천 명을 선동하여 동맹 파업을 주도하여 『동아일보』에 중요 기사로 다루어졌다. 이후 중락회(衆樂會)를 조직하여 민족 사상과 자주 정신을 고취하였다. 도일 증명 발급이 불허되자 비인도적 처사라며 항의하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당하고 경남경찰국장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습례리에서 별세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 1990년 12월 26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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