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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 불천위제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633
한자 張顯光不遷位祭祀
영어의미역 Immutable Position Ritual of Jang Hyeongwang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642-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석대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불천위|추모 의례
의례시기/일시 9월 7일(음력)
의례장소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642-2 사당지도보기
신당/신체 위패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인동장씨 남산파 남산고택의 사당에서 음력 9월 7일에 지내는 장현광의 추모 제사.

[개설]

인동장씨 문중 제례는 기제·묘제·차례 이외에 장현광의 불천지위(不遷之位)가 있다. 불천위제사는 집안에서 4대 봉사로 끝내고 있는 기제사(忌祭祀)와는 달리 자손대대로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불천위제사는 국가에서 내리는 국불천위, 유림에서 허락한 불천위, 문중에서 조상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내는 이른바 사불천위(私不遷位) 등으로 구분된다. 장현광은 지역의 유림에서 학문적인 업적이 뛰어난 분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불천위제사다.

장현광 불천위제사는 남산고택의 사당에서 매년 기일인 음력 9월 7일에 후손들이 향사하고 있다. 이 제사는 인동장씨 남산파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는데, 장현광뿐만 아니라 장현광의 부인도 합설(合設)하여 모신다.

[연원 및 변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1554년(명종 9) 인동 남산(현 구미시 인의동)에서 태어났다. 42세 때 학행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천거를 받아 보은현감에 나갔으나, 그 후 모든 벼슬의 제수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1636년(인조 14) 영남 지역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모으기도 했다.

장현광의 높은 학문과 덕망은 17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면서 영남에서 그의 학통을 세우게 된다. 1637년 서거한 후에는 구미 금오서원·영천 임고서원·성주 천곡서원 등 영남 지역의 여러 서원에 위판(位版)을 봉안할 만큼 대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이러한 발자취는 영남 유림에서 불천위제사로 받들기에 이르렀다.

[신당/신체의 형태]

현재 장현광의 사당은 본래 조선 중종 때 ‘증이조판서장열(贈吏曹判書張烈)’의 가묘(家廟)로 지어졌다. 그 후 장열의 아들 장현광의 위패를 봉안한 이후에 불천위 사당이 되었다. 사당은 구미시 인의동 남산고택의 정침 오른쪽 뒤편 경사지의 토담 안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 안에는 장현광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현재 사당 안에는 장현광의 위패를 별도의 감실에 봉안하였으며, 그 옆으로 4대조까지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

[절차]

제사의 절차는 행출주례(行出主禮), 행강신례(行降神禮), 행초헌례(行初獻禮), 행아헌례(行亞獻禮), 행종헌례(行終獻禮), 행유식례(行侑食禮), 행사신례(行辭神禮)의 순서에 따라 시행한다.

[현황]

장현광 불천위제사의 준비는 유사가 장을 보고 집안 어른들이 모여 준비한다. 6·25전쟁 때까지는 제사를 준비하는 ‘고직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고직이’를 할 사람이 없어 인동장씨 남산파를 중심으로 집안 사람들이 모여 준비한다. 예전에는 유림에서도 제사에 참석했으나, 지금은 집안 어른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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